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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중견기업] 대성그룹은 …뚝심으로 '대성'한 토종 넘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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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손무룡 대표이사 부회장

종합가스메이커인 대성산업가스㈜의 최근 실적을 보면 대성그룹(회장 김영대) 모회사인 대성산업㈜이 부럽지 않다. 대성산업가스의 지난해 매출은 2300억원대, 순이익은 300억원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성산업은 지난해 8328억원의 매출과 362억원의 순익을 냈다. 석유가스와 해외 유전.가스전 개발, 기계.컴퓨터, 건설 등 다양한 사업부문을 거느리고 있는 모기업과 비슷한 규모의 이익을 낸 셈이다. 대성산업가스는 국내 관련업계 2위다. 국내 산업가스 시장은 1위 업체인 미국계 에어프로덕츠코리아 등 '빅4'가 차지하고 있다. 빅4 가운데 지배주주가 한국기업인 곳은 대성산업가스뿐이다.

◆가스사업 키우기까지=대성그룹 손무룡(71) 부회장은 1979년 대성산업가스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 회사를 키운 공신이다.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에너지와 연관있는 신규 사업을 모색하던 그룹 창업주 고(故) 김수근 명예회장이 "액화가스 사업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초저온 액화가스 기술이 전무한 상태라 설비 도입에서 건설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의 그룹 오너인 김영대 회장과 함께 100% 외국 기술에 의존해 80년 반월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프랑스 합작선은 영업 노하우만 알려줄 뿐 제조기술은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손 부회장은 "공장 건설 초기부터 외국인 기술자에 의존해 공사를 했고, 준공 뒤 공장 운영까지 외국인 지도를 받아야 했다"며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쓴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개발(R&D)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초저온 가스산업의 기술 토착화에 남달리 열정적이었던 창업주와 김영대 회장도 적극 지원했다. 89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초저온연구소는 이렇게 탄생했다. 덕분에 그 이후 28년간 크고 작은 가스생산 공장 32개를 우리 기술로 지을 수 있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으로 꼽은 것은 2005년에 LG필립스LCD 파주공단 내에 세운 공장이다. 1500억원이 투자된 이 시설은 외국인 도움으로 건설했던 첫 공장보다 40배나 크고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의 초고순도 가스 플랜트다. 그는 "오너의 신뢰가 없었으면 이런 대규모 투자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대성산업가스 설립 초기 이사였던 손 부회장은 98년 이 회사 대표에 취임한 뒤 10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지난 10년간 이 회사 매출과 순익은 세 배 이상 성장했고, 제품 생산능력은 80년에 비해 116배나 커졌다.

◆45년 직장생활 비결=손 부회장은 경북대 화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62년 대성산업공사 연구실장으로 입사했다. 대구상고 대선배였던 김 명예회장이 한국 최초의 연탄연구실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나하고 평생을 같이 가자"며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연구실장 시절 그는 독가스를 내뿜지 않는 연탄 개발에 매진했다. 당시는 연탄가스 사망자가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았던 때였다. 무독연탄 개발에 성공했지만 경제성이 없어서 접었다. 그 대신 연탄가스를 미리 막을 수 있는 연탄가스 발견탄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73년 연탄 관련 논문으로 경북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도 땄다. 덕분에 국내 최초의 '연탄 박사'란 말도 들었다.

그는 직장생활 45년차다. 74년 대성산업 최연소 이사가 된 이후 임원만 33년째다. '사오정(45세 정년)'.'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 소리를 듣는다)'가 유행어인 요즘 어떻게 그리 오래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꼭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그는 "한 우물을 파니까 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 17년은 에너지(연탄) 분야에서, 다음 28년간은 초저온 공학 분야(가스)에서 최고의 전문가란 평가를 들으며 일했다. 특히 가스 분야는 기술이 간단해보이지만 노하우가 많이 필요한 분야여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다. 반도체에서 우주선까지 가스가 쓰이는 곳은 무궁무진했다. 전공분야여서 재미도 있었다. 그는 "연탄공장만 오래 했으면 아마 관두고 교수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오랜 직장생활에 회한은 왜 없을까. 손 부회장은 "일흔이 넘은 현재까지 현업에 종사하다 보니 그동안 묵묵히 참고 뒷바라지해준 아내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부인 문귀주(70)씨는 경북대 화학과 동기동창이다. 한때 퀴리처럼 부부 과학자로 사는 게 이들의 꿈이었다.

손 부회장은 백발이지만 염색했다. 그는 "요즘 40대 후반과 50대 초반의 대기업 CEO들이 많다"며 "거래처 사장 등을 만날 때 상대방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염색했다"고 했다. 지난 20년간 매일 저녁 3㎞를 걷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게 건강관리 '비법'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팔목의 낡은 전자시계에 눈길이 갔다. 전자계산기가 달려 있는 3만원짜리 시계를 10년 넘게 차고 있었다. 실제로 가끔 계산기를 두드린단다. "숫자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적당한 스트레스는 건강에도 나쁘지 않습니다."

글=서경호 기자<praxis@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대성그룹은

올해로 창업 60주년을 맞은 대성그룹(www.daesung.co.kr)은 연탄에서 출발해 한국의 대표적인 가스.에너지 전문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룹의 모태는 1947년 출범한 대성산업공사였다. 59년 대성연탄을 설립한 뒤 급성장했다.

60년대는 난방과 취사를 위해 연탄을 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73년 1차 오일 쇼크, 78년 2차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창업주인 고 김수근 명예회장은 액화가스 사업으로 다각화를 했다. 79년 대성산업가스, 83년 대구도시가스와 서울도시가스를 잇따라 설립했다. 2001년 2월 김 명예회장이 타계한 뒤 계열분리를 거쳐 3형제가 각각 독립 경영을 하고 있다.

창업주의 장남인 김영대 회장은 명예회장 타계 직전인 2000년 11월 대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김 회장은 그룹의 모기업인 대성산업㈜을 포함해 대성산업가스㈜.한국캠브리지필터㈜.대성쎌틱㈜.대성계전㈜.대성C&S㈜.대성나찌유압공업㈜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주로 에너지.기계.전자.기초소재.건설.열병합발전.환경분야 기업들이다. 2005년 기준으로 그룹 매출이 1조1173억원에 달한다. 인재양성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공익재단인 '해강대성장학재단'도 운영하고 있다.

차남인 김영민 회장은 서울도시가스 계열을 맡고 있다. 3남인 김영훈 회장은 대구도시가스등을 맡고 있으며, 최근 영화산업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

계열사인 바이넥스트창업투자를 통해 2003년부터 '괴물' '웰컴투 동막골' '올드보이' '마라톤' 등에 투자해 재미를 봤다. 3남 김 회장도 자신이 이끌고 있는 계열 이름으로 '대성그룹'을 쓰고 있다. 창업주의 막내딸인 김성주 회장은 성주인터내셔널 등의 성주그룹을 이끌고 있다.

김영대 회장의 대성그룹은 창업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새로운 CI(그룹 통합이미지)를 만드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3남 김영훈 회장이 맡고 있는 또 다른 대성그룹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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