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TV 「정신대 실태」폭로 앞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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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학순할머니 소복시위 계기/태국 현지서 생생한 증언 취재/일 정부선 “자료없다” 발뺌 급급
일제하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다니며 온갖 치욕을 당해야 했던 한국인 정신대(종군위안부) 문제가 태평양전쟁발발 50주년을 맞아 일본내에 새로운 충격과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계기마련의 장본인은 지난 6일 정신대로서는 처음으로 동경지방재판소에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김학순 할머니(67). 15일까지 일본에 체류,모두 일곱차례에 걸쳐 강연과 소복차림의 가두시위를 하면서 『나를 17세때로 돌아가게 해주오. 당신네 일본 사람들이 나의 청춘을 망쳐 놓았다』고 눈물로 호소,일본인들에게는 감춰두고 싶은 과거의 치부를 새삼 들춰낸 것이다.
TBS·아사히TV 등은 14일과 15일 잇따라 「보도특집」을 통해,정신대문제를 집중 취재,이제까지 일본정부 주장과는 달리 종군위안부가 정부군의 지시하에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밝혀냈다.
특히 TBS­TV는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을 감춰온 채 50평생을 눈물과 기도로 살아온 다른 정신대 할머니를 태국 하자이시에서 찾아내 관심을 모았다.
이 할머니(68세)의 이름은 3개였다. 현재의 이름은 이오카(태국명) 정신대로 수모를 겪던때 일본 이름은 미쓰다 시즈코,원명은 노수복.
조국을 말을 잊은채 혼자 쓸쓸히 살아온 노할머니는 매일의 생활을 「회한의 기도」로 보낸다고 태국어로 말했으며 카메라는 엎드린채 정성스럽게 사원에 나가 불공드리는 할머니의 굽은 등을 서글프게 비춰주었다.
노할머니의 증언은 일본군국주의가 식민지 치하의 어린 조선인 여성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42년 가을 21세때 부산에서 우물물을 긷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가는데 일본인 순사가 다가왔어요. 무서운 나머지 물동이가 떨어지면서 순사의 옷이 물에 젖어버렸지요. 순사는 갑자기 나의 손을 묶더니 차 속에 던져버렸어요.
10일후 군복을 입혀 6명의 낯선 여자들과 함께 「황국사절단」으로 군함에 태워 싱가포르에 보내졌지요. 낮에는 병사를 청소했고 탄약운반등 중노동의 나날이었지요.
아침부터 일본병 상대를 하는데 하루 60명 이상이 찾아오는 날도 있었어요.
전황이 악화하자 군인들은 더 포악해졌어요. 가장 나이어린 18세 처녀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죽었어요.
일본 항복뉴스를 들었을때는 「만세」를 부르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지만 이런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단념했지요.』
아시히TV는 지난 10월중순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의 유일한 증언자 「봉기」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클로스업시키기도 했다.
10만∼20만명으로 그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정신대의 실태」가 이처럼 일본인 자신의 손으로 폭로되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조사하고 있지만 정부간여 사실을 밝히는 자료가 없다』(12일 가등굉일 관방장관 발언)고 발뺌을 계속할 뿐이다.
양TV에 나온 당시 「처녀사냥의 집행인」 요시다 세이지(길전청치·78·당시 산구현 노무보국회동원과장)씨는 『종군위안부는 당시 일본 최고통수권자인 대본영이 한 것』이라고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강제징용·연행자명부조사에서도 일본 외무성이 제공한 총수의 10%도 안되는 9만명 남짓의 「턱도없는」명부를 받아 놓은채 사장시키고 있는 한국 정부는 이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 최소한 이들 살아있는 증언자들의 기록을 죽기전에 채록,민간인들의 보상재판을 뒷받침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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