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손 거친(훈·포장)3만여개"|상장 도안 28년 서기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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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 중앙부처의 웬만한 공무원치고 서기유씨(64·총무처상훈과서훈담당)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이름만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조박사』 라면 대개 알아본다.
별정직5급으로 28년째 총무처에서만 근무해온 그는 청백리등 우리나라 엘리트공무원사의 산 증인이다.
30년 가까이 훈·포장 도안과 서훈장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해온 조씨의 손을 거친 훈장·표창장은 무려 3만여장에 이른다.
그러나 28년간 결근 한번 없이 근무해온 그는 정작 단 한건의 훈장이나 표창장도 받아본 적이 없다. 「왠지 거북하고 쑥스러워서」몇 차례 있었던 권유를 극구 고사했다.
『나라에 공헌한 분들을 기리는 서훈장이 내 글씨로 만들어지고, 내가 도안한 훈장이 그분들의 가슴에 걸리고 후손들에게 가보로 전해진다는건 보통 큰 보람이 아닙니다』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 덕에 지난 63년 「모필사」로 총무처에 발탁된 조사무관이지만 그러나 그는 단순한「기술자」가 아니다. 69년 대한민국국전 서예부문에 당당히 입선한 서예가다. 한국화에도 능한 그는 요즈음에도 화조를 주제로 한달에 한점정도 작품을 낸다.
서씨가 가장 부담을 느끼는 때는 항상 개각설이 나도는 매년 연말, 즉 이맘때다.
『지난해 12월 강영훈총리가 물러나고 노재봉총리가 들어섰던. 개각때는 2천여명분의 훈·표창장을 몽당 고쳤습니다』
훈·포장이 수여될때는 그 증서에 서훈권자(대통령)의 이름과 함께 국무총리와 해당부처 장관의 이름(부기자)이 따라 붙는다. 갑작스런 개각이 단행되면 미리 써 놓았던 증서들이 모두 휴지조각이 돼버린다. 연간 8건여건에 이르는 훈·포장중 상당수가 연말로 집중되는 탓에 생기는 고충이다. 올해도 6백여명분을 미리 작성해 두었는데 얼마전부터 12월 개각설이 나돌아 조씨는 며칠밤을 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
『표창대상자로 내정된 공무원이 하루아침에 숙정대상자로 바뀌어 관직을 떠날때는 참 안타깝더군요.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겠지만…표창장을 폐기처분하면서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격변기에는 더하지요』
근30년을 한 업무에 종사해온 그는 공직사회에 불어온 정치바탕이 훈장증서나 표창증서에 끼친 갖가지 영향들을 기억한다. 그가 지금까지 기록했던 통치권자, 즉 증서의 「서훈권자」중 가장 긴 이름은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서리 박충훈」이다. 80년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난 직후의 일이다.
지난66년 우리정부가 자유중국의 장개석총통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할 때 그는 지금의B4용지 크기의 훈장중에 무려 2천여자를 깨알같이 적어넣었다. 정부에서 장총통을 특별히 배려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도움준 일, 임정과의 관계, 총통의 개인적 이력과 업적등을 상세히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
또 74년 미국의 포드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는 박정희·포드 두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를 맡아 그려 그의 「작품」이 중앙청에 내걸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50, 60대가 현재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부분 역경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듯이 조씨도 순탄치 못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그는 1928년1월4일 함경남도 외진에서 태어났다. 장률보통학교때 부모가 잇따라 변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낸 채 지내다 18세때인 46년 단신 월남해 숱한 고생을 하게 된다.
국민학교때 그는 그림·글씨에 일찍 재능을 보여 학예회나 운동회가 열리면 교장이 그를 불러 행사용 플래카드 글씨를 쓰게 했을 정도였다.
신문배달등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그는 48년에 서울 돈암동의 옛 동도극장을 무작정 찾아가 간판 그리는 일을 맡게해 달라고 간청했다. 「실기테스트」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보조원으로 채용됐다.
조씨는 그가 독자적으로 담당한 최초의 영화선전 간판이『사도세자』였다고 기억한다.
6·25로 군에 입대한 그는 제주도신병훈련소에서 근무하며 훈련장안내간판·지도·각종 행정차트등을 도맡았다. 당시의 미고문관들은 그의 재능과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제대후 극장일을 계속하던 그는 63년1월 서울종로2가에 「국제공보사」라는 광고·문자도안 대행업소를 차려 드디어 독립했다. 그러나 사업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고, 그는 광화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총무처의 모필사채용공고를 보고 응시, 실기시험을 거쳐 합격했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그는 서예·회화공부를 독학으로 계속했고, 이는 몇년후의 국전입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국 왕희지의 행서체는 아직도 그의 마음을 끈다. 장진주문장들의 유려한 음률이 귀에 쏙 들고, 논어의 덕부고필유린은 그가 즐겨 쓰는 문구.
『글씨 잘 쓰는 이가 총무처상훈과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지방행정기관장들도 그의 휘호를 받으러 부원간리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각종 정부간행물의 제자들이 그의 글씨로 박혀지기도 했다. 과천정부 제2청사의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등 전 부처의 현판이 그의 「작품」 이기도 하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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