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억울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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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또한 억울할 것이다. 자체 평가로는 제법 괜찮은 성적표인데 사람들이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낙제생 취급을 하니 말이다. 노 대통령 발언의 행간을 읽어 보면 그의 마음속에는 섭섭함을 넘어서는 어떤 분노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게 된다.

따져 보면 노 대통령은 그가 실제로 해낸 일들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자금이다. 노무현 정부 이전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엔 큰 선거 때면 온 나라가 금권선거를 걱정했다. 대선 한 번 치르는 데 몇조원이 든다는 증언이 나왔고, 총선 때는 50당40락(50억원을 쓰면 당선되고 40억원을 쓰면 낙선한다) 등의 조어들이 횡행했다. 선거 무렵의 통화량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통계도 있었다.

이런 풍토가 현 정부에 와선 달라졌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실시된 17대 총선거와 5.31 지방선거를 우리나라 선거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로 치러냈다. 아직은 그리 높지 않은 우리 사회의 투명도를 감안할 때 깨끗한 선거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공헌은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인하기 어렵다.

또 있다. 사람들은 노 대통령의 아들 딸과 사위가 뭐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게 됐다. 좋은 뜻에서건 나쁜 뜻에서건 대통령 부인이 돈을 만진다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대통령 가족은 물론 국민을 위해 다행한 일이다. 이 역시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게 그간의 정치 현실이었다. 지난 네 번의 정권 모두 임기 후반이면 대통령의 친인척이 공적 영역에서 저지른 전횡 때문에 홍역을 치른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지금도 고령의 전임 대통령의 후광에 기대려는 아들이 화제가 되는 실정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억울한 부분은 대북 정책일 것이다. 사실 누가 대통령이든 대북 화해 정책은 포기할 수 없다. 전쟁을 원치 않는 이상 어떻게 대화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한나라당이 집권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퍼주기 논란도 정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떤 지도자가 식량과 에너지가 모자라 수백만 동포가 굶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북한을 봉쇄하고 고립시켜 대량 참사가 재발하도록 수수방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한나라당까지 자신들의 강경 노선을 포기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유화론 시비로 지지율을 까먹어야 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야당을 붙잡고 "내 본전 내놔라"고 요구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을 것 같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정책은 전임 정부의 햇볕정책과는 달리 불투명한 자금을 주고받는 뒷거래 의혹을 받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교 우위가 있다. DJ의 대북송금 의혹에 특검을 결정했던 노 대통령이 자신도 북한에 테이블 아래로 현금을 건넸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때 북한으로부터 박대당하고, 그로 인해 "퍼주고 욕먹는다"는 남쪽의 냉소를 받기도 했지만 남북 관계의 투명성은 한층 높아졌다. 차기 정부가 대북 정책에 대한 국민의 동의를 얻기도 그만큼 수월할 것이다.

나는 국민이 이런 일들을 잊어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억울할 일도 분노할 일도 없다고 본다. 노 대통령이 원칙을 지켜 묵묵히 나가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집권 전의 정치인 노무현은 늘 빈손으로 출발점에 섰었다. 대통령직을 물러나면 어떤 형태로든 새 출발을 해야 하는데, 그때 역시 "빈손으로 시작한다"는 다짐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김교준 정치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