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지금, 태양을 다시 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그리스신화에 이카로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왕의 미움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미궁에 갇힌 이카로스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이고 하늘로 날아 탈출한다. 그러나 새처럼 나는 게 마냥 신기해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어버린다. 결국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버리자 날개를 잃고 바다에 떨어지며 생을 마감한다. 이후 '이카로스의 날개'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이나 원대한 이상을 품은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과학의 시대에도 '이카로스의 날개'를 향한 인간의 상상력은 멈추지 않는다. 대니 보일 감독의 새 영화 '선샤인'(4월 19일 국내 개봉 예정)도 그렇다.

영화는 2057년 태양이 죽어가면서 인류 전체가 소멸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구에서는 최후의 방법으로 태양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태양을 되살릴 방법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8명의 우주인이 '이카로스 2호'를 타고 태양을 향해 떠난다. 이카로스란 우주선의 이름은 이미 그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최근 LA 인근 샌타모니카 해변의 한 호텔에서 만난 보일 감독은 "관객들이 태양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말문을 열었다. "태양은 인류를 지탱해 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태양이 없으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영원한 밤과 어둠, 공포와 추위에 떨게 되겠죠."

그는 태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시대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선조들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고 희생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태양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죠. 한편으론 전기 덕분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가 신에게서 멀리 떨어졌다는 얘기도 됩니다."

영화는 첨단기술의 우주선과 우주인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물이면서 정작 이야기의 중심은 정신적인 면에 둔다.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웅장한 스펙터클이나 화려한 액션은 보기 어렵다. 대신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인의 미묘하고 복잡한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도 반복된다.

"영화가 종교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정신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전통적으로 태양과 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인식을 넘어선 어떤 것이 태양과 우주에 있을지도 모르죠. 과학만으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거든요."

배우 8명의 구성도 특별하다. 미국과 영국의 합작영화지만 아시아계 배우도 3명 포함됐다. '무극' '황혼의 사무라이'의 사나다 히로유키(下澤廣之), '와호장룡' '게이샤의 추억'의 양쯔충(楊紫瓊)과 영국 출신의 중국계 배우 베네딕트 왕이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유명한 킬리언 머피도 나온다.

"영화는 앞으로 50년 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때쯤이면 세계 경제는 미국과 아시아로 양분돼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아시아계 배우가 최소한 세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국적의 문제와는 상관없습니다."

보일 감독은 특히 '이카로스 2호'의 가네다 선장 역할을 맡은 사나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장은 누굴 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그러다 동료의 추천을 받아 '황혼의 사무라이'를 봤는데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위엄과 힘이 있었죠."

마약에 찌든 영국 젊은이를 다룬 '트레인스포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보일 감독으로선 마음만 먹으면 톱스타 캐스팅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비치'(2000년)에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에게 주연을 맡긴 적도 있다. 그러나 '선샤인'은 톱스타보다 연기파 배우를 고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톱스타가 좋은 점도 있습니다. '비치'를 홍보하러 일본에 갔을 때 수백 명의 기자가 디캐프리오에게 플래시를 터트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내 생애 그렇게 많은 기자는 처음이었거든요. 그러나 이번에는 톱스타 한두 명보다는 우주인 8명 모두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LA=주정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