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시장 개방 반대만 할건가/박영철(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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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농민과 농업단체를 선두로 정부의 고위정책당국자로부터 일선의 실무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신문·잡지 모두가 우리의 쌀시장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개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쌀수입의 반대는 경제적인 합리성이나 효율의 논리를 떠난지 오래며 이제는 우리의 정치적인 여건,문화적인 특수성,그리고 안보적인 차원에서 그 당위성이 논의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쌀수입 금지와 양곡수매제도를 포함하는 농업정책전반에 대해 깊은 우려와 개편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쌀시장의 개방이 하나의 터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성 알면서 침묵
UR 다자간 무역협상이 제대로 타결될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도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UR협상이 타결될 것이며 이 경우 일본은 부분적으로나마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일본이 지켜온 방어선이 무너지면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쌀수입 불가를 고수해야 할 것인데 얼마나 더 오래 외국의 개방압력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요즈음 미국이나 EC의 강경한 자세로 보아 이들 강대국들이 좀처럼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 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쌀시장을 개방한다고 해 미국이나 다른 농산물 수출국이 그리 크게 덕볼 것은 없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종식과 걸프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은 중진·후진국에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의 실천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실력행사도 불사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정책당국은 우리가 쌀시장을 열지 않아 무역보복을 받게 되거나 혹은 쌀수입이 불가피해지는 경우를 가정해 지금부터라도 대응전략을 마련해야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그 자체가 외국에 쌀수입 반대에 대한 국민 전체의 단합된 모습과 굳은 결의에 틈이 생기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지 그 논의조차 금기로 되어 있다. 쌀수입 반대를 사수한다는 전략은 있어도 만일 이 방어선이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한 제2,3의 방어선은 아무도 생각지 않고 있다.
선거를 네번이나 치러야 하는 정치적 부담때문인지,아니면 우리의 반대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서인지 정부와 여당은 절대불가 이외의 다른 대안은 고려조차 않고 있다.
우리 경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어느 외국학자는 우리처럼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가 UR협상의 결과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며 외국의 보복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쌀수입 불가를 고집하는 것은 농업을 둘러싼 이해의 상충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은 외국의 압력을 빌미로 삼아 쌀시장을 개방하는 의도가 아니겠느냐고 물어 온다.
○대안없이 “절대 불가”
그러면서 외국의 압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어 정치적으로는 편할지 몰라도 그 버릇이 습관화된다면 결국은 경제정책 운영의 자주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우리는 대외지향적인 발전전략을 추구해 가장 성공한 나라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분배의 개선과 복지향상을 둘러싼 각 부문간의 갈등과 대립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가 대내지향적으로 그 성격마저 바뀌고 있으며 국제사회에 있어서 우리의 위치를 잊어버리기도 하며 그 보다는 급변하는 세계경제여건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마저 게을리하고 있다. 아울러 부문간·계층간의 서로 엇갈리는 이해를 타협과 양보를 통해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역이나 해외투자와 관련된 외국과의 마찰도 그원인을 우리의 기준으로 보며 타협보다는 대립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우리는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작은 경제로서 외국과 별다른 마찰없이 살아가려면 싫든 좋든 경쟁과 효율이라는 두 기준에 따라 운영되는 세계경제 질서에 적응해야 한다. 즉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으면서 우리가 지은 쌀을 먹고 살려면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확대로 쌀생산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장기적으로 이길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정부도 앞으로 10년동안 농촌의 발전을 위해 42조원의 재원을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살길은 경쟁력 제고
이러한 규모의 투자가 실제로 실현될는지,만일 이루어진다면 농업의 경쟁성이 높아지게 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쌀의 자급자족과 농업부문의 보호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할 정책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우리는 쌀시장 개방의 불가를 주장하기에 앞서 얼마만큼의 투자재원을 농업부문에 투입해야 우리 농업이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겨 낼 수 있으며 그러한 투자의 득과 실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농업부문의 투자 확대는 타부문,특히 제조업부문 투자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할 수도 있는데 이런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절대불가만을 고집하다가 준비없이 밀리기 시작하면 결국 끝까지 밀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쌀시장 개방의 부작용은 더 확대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힘으로 막을 수 있는 피해는 당하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고려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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