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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옛터를 가다(4)중앙일보·대륙연구소 주관 학술기행|하늘에 오를 듯 우뚝선 천추총|집안의 고적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토구자 고개를 넘어 집안평야와 왼쪽의 장군총을 굽어보며 차가 시가지 쪽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면 좌우의 밭과 산등성이에서 적석총들이 손짓을 한다. 이 일대에선 어느방향으로 가든 고분들을 발견케된다.
집안평야에는 대략 l만l천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이 있다. 이중에는 발해와 요·금대의 고분들도 꽤 있으나 대다수는 고구려 고분이며 역사적·문화적 가치의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이들 고분들은 그 분포지에 따라 현재 6개 고분군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 양식면에선 두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돌을 쌓아서 만든 적석총이다. 서울의 강남에 있는 석촌동 백제고분들도 그러한 고구려고분양식을 이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석실봉토분이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들어 시체와 부장품을 그 속에 넣고 그 위를 흙으로 엎어 둥글게 무덤을 만든 것이다. 이런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된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 일행은 그간 군사지역이라는 이유 등으로 접근을 거부당해왔던 몇 개의 고분들을 새로 답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천추총이다. 천추총은 집안평야의 서남쪽 부분인 마선구 지역의 마을옆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아올린 계단식 적석총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진 상태로 무덤전체가 큰 돌무지 산을 연상케 했다. 더듬어 나가다보니 무덤의 동남쪽 부분에 3단의 기단이 남아있었는데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본래는 이보다 몇단 더 높이 쌓아졌을 것 같다. 정상부에는 어떤 건축물을 세웠던 토대석이 뚜렷이 남아있고 무덤 전체에 기와 조각이 널려있었다. 장군총 정상부의 가장자리에 기둥 구멍이 죽뚫려 있던 점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돌더미 가운데 「천추만세토록 견고하소서(천추만세영고)」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천추총이라고 부르게되었다.

<커다란 돌산과 흡사>
천추총은 한변의 길이가 80∼85m나 되며 무너진 상태로서의 남은 높이가 15m정도 된다. 한변이 66m인 태왕릉 보다 크며, 한변이 31.58m인 장군총보다 몇배나 크다. 천추총은 고구려 고분중 가장 큰 무덤이다.
그런데 이 3개의 왕릉중 석실의 크기와 그 축조기술이나 미적인 면에선 장군총이 가장 앞선다. 장군총이 제일 뒷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으로 여겨지므로 장군총은 그다음 왕인 장수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면 천주총은 광개토왕 이전의 어떤왕의 무덤일까.
아무튼 이 3개의 왕릉에서 보듯 고대의 무덤은 일정단계까지는 그 외형적인 규모가 커져가다가 그 뒤부터는 점차 크기는 작아지고 보다 세련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면은 경주 신라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고금을 통해 각 시대의 문화양상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어떤 일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대묘는 마선구하를 건너 집안평야 서남쪽 끝에 있었다. 산기슭에서 상당히 위로 올라간 지점에 놓여있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쌍분처럼도 보였다.
길이 없어 키를 넘는 옥수수의 밀림을 헤치며 한참 나가다보니 문득 코앞에 큰 돌더미가 나타났다. 이 고분도 계단식 적석총인데 무너져내려 어린아이 머리만한 막돌로 뒤덮여 있었다. 정상부에 오르니 집안평야의 서남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규모면에서 천추총보다는 작지만 한변이 55m나 되어 왕릉급으로 추정하기에 무리가 없다. 이 무덤에도 기와 조각이 널려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적석총을 쌓고 그 정상부에 어떤 건축물을 지었던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서대묘는 그 중앙부에서부터 앞목으로 거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패어 있고 그 부분에서 파낸 많은 돌들이 무덤앞으로 흘러내려져 있었다. 그래서 멀리서 볼때 상분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고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 와서 보니 더욱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제왕의 헛된 욕망과 무수한 고통을 되뇌면서 발아래 흐르는 압록강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이래저래 임자 없는 무덤이 된 돌무리에서 이끼 낀 기와조각 하나를 주워들고 서둘러 다음 행선지를 찾아나섰다.
3세기에 쓰인 삼국지 고구려전에 전하기를 고구려인은 후장을 했다고 한다. 어디 고구려뿐인가. 신라인·백제인들도 그러했으며 고대인 모두가 그러했었다. 이는 죽은 뒤에도 현세에서 누리던 지위와 부가 그 무대만 바뀔뿐 그대로 내세에 이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에선 슬픔을 달래고 내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춤과 노래로 죽은 자를 보냈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 다시 삶을 이어갈 죽은 자의 시신을 잘 보존키 위해 크고 튼튼한 유택을 지었으며 그속에다 금·은·재물, 심지어 부여에선 백여명의 사람을 함께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내세관은 불교가 수용된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불교적 내세관에선 죽은자의 현세에서의 지위가 그대로 내세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윤리 기준에 의한 평가에 따라 다시 태어날 내세에서의 삶이 결정된다고 했다. 따라서 현세의 부귀는 내세에선 의미가 없으며 후장은 후손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은 될지언정 죽은 자에겐 부질없는 것이 될수 있다. 그에 따라 매장 풍속에서도 큰 변화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에서 불교를 수용한 초기의 신앙형태가 일부 반영되어있는 벽화를 담고 있는 장천 1, 2호분이 주목되어왔다.

<불교신앙 일부 반영>
1970년대 초에 발굴된 후 아직 외국인에게 공개된 바 없다고 하는 이 고분들을 이번에 볼 수 있다고 하여 잔뜩 기대를 걸고 찾아갔다. 집안평야의 동북쪽 끝을 돌아 압록강변의 좁은 기슭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나아가니 강변의 작은 분지 서북편 낮은 구릉위에 고분군들이 보였다. 집안 중심가에서 대략 22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마침 소나기가 내렸으나 차에서 내려 물섶을 헤치고 구릉 위로 올라갔다.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고분이 각각 구릉상에 있었고, 서쪽의 2호분 옆에는 다른 작은 고분들이 보였다. 두고분은 외형상으로 볼때 상당한 규모였다. 그런데 정작 묘실 입구에 이르니 철문이 굳게 잠겨있었고 현지 안내인은 더 이상은 안된다는 것이다. 크게 실망했으나 외형을 처음 본것만으로 자위할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해방구에 있는 모두루묘를 찾았다. 모두묘는 광개토왕대에 활약했던 귀족인데 그의 무덤 묘실벽에 먹으로 쓴 8백여자의 글씨가 있다. 그중 1백수십자 밖에 판독되지 않고 있는 상태인데 여타의 글자도 상당수는 먹의 흔적이 남아있어 과학기재를 사용하면 더많은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이번 답사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키 위해 꼭 찾아보려했다. 그간 모두루묘는 광개토왕릉비와 고분벽화에 가려져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묘지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만약 묘지중에서 몇십자라도 더 판독되면 그것은 고구려사연구에 직접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분 역시 조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함께 크게 우려되는 것은 무덤이 압록강변 쪽으로 논옆에 있기 때문에 논물과 지하수가 묘실안으로 흘러들어갈 수도 있겠고 그러면 묘실의 회칠한 벽면이 크게 손상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중국학자들도 근래 이 고분의 상태를 조사한 적이 없다고 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더 늦기 전에 하루 속히 정밀 조사가 행해져야겠다.
유적의 조사·보존문제는 오도분의 5호묘와 씨름무덤(각해총) 춤무덤(무용총)의 벽화에서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몇달만에 두번째 보게되어 다소 차분한 기분으로 자세히 살피니 벽화의 훼손상태가 심각했다. 그것은 벽면으로 스며드는 묘실내의 습기를 막기 위해 벽화 표면에 화학물질을 발라 방수처리를 해놓은 것인데, 그렇게 되면 벽면 뒤쪽에서부터 스며나오는 습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결국 벽화가 썩고 변색될 것이 틀림없으니 길게 보면 벽화에 큰 손상이 가게 마련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민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눈에 익었던 수렵도등의 벽화그림이 훼손되어 영영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벽화 훼손상태 심각>
그 다음으로 고분벽화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보다 종합적인 연구의 필요성이다. 벽화의 주요 장면 장면은 그간 알려져 왔고 또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한 고분의 여러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그 전부가 상호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전체의 상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망자의 세계와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없다. 가령 씨름무덤의 벽화에서 우리 일행의 관심을 끈 것은 동쪽 벽의 씨름그림 옆 나무 아래에 곰과 호랑이가 앉아있는 부분이었다. 신수와 곰과 호랑이라면 한국인이면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있다. 단군신화다. 그렇지만 이것을 두고 곧바로 단군신화의 반영이라고 운위할 수는 없다. 씨름무덤의 벽화 전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이 부분이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곰과 호랑이와 나무를 그린 것은 장천 1호분의 도판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큰 나무의 밑동에난 굴(수동)에 흑곰이 들어있고 그 옆에는 무사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수렵도의 일부분으로 그려진 것이다. 아무튼 종합적 고찰을 위해선 우선 고구려 벽화고분전체에 대한 정밀조사와 자료확보가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집안지역의 고분은 고구려인의 사상·종교·예술. 건축기술등 여러측면에서의 빼어난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한국 고대문화의 보고다. 이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한중수교가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이제는 정부당국의 각별한 관심이 절실히 요망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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