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7가] 선동렬 감독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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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배우, 국민 여동생, 국민 가수….’ 지 금은 그렇게들 부릅니다. 하지만 불과 이십 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국민은 ‘어딜 감히’였습니다. 대신 따라다닌 관형어가 있었으니 나라의 보물, ‘국보 ’였습니다.

그렇다면 100년 한국 야구사에서 국보란 월계관을 쓴 선수는 누구였을까요? 전무후무, 선동렬 현 삼성 감독이 유일합니다. 옛날 야구의 향수에 젖은 일부 호사가들이 70년대~80년대 중반을 풍미한 최동원을, 혹은 당대의 젊은 마니아들이 박찬호를 입에 올리지만 족탈불급(足脫不及)입니다.

고교야구 최초의 전국 대회 노히트 노런(1980년 봉황대기 경기고전), 청소년 대표 시절 이미 90마일이 넘는 광속구를 뿌려 메이저리그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1982 년 고려대 2학년생으로 한국 야구를 사상 첫 세계 선수권 우승으로 이끈 약관의 에이스. 그것들 뿐만이 아닙니다.

박찬호보다 훨씬 먼저 1985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수도 있었으나 병역 문제로 접고 고향팀 해태에 입단해 ‘빨간 유니폼의 타이거즈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 제쳤습니다. 0점대 방어율 등 숱한 전인미답의 기록들을 아로새기던 그는 “한국에선 더 이상 이룰 게 없다”며 1996년 대한해협을 건너가 ‘국보 투수’의 박물지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를 하나밖에 없는 국보 투수로 추앙케 한 것은 꼭 기량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표팀의 전 력 분석 요원으로 그가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했을 때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에 침이 말랐습니다. “그늘에서 쉬어도 괜찮을 대스타가 어깨에 파스를 바를 정도로 배팅볼을 던지고, 훈련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공을 줍고….”

그런 후일담을 전하면서 “역시 선동렬이더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엄지를 치켜세우던 한 해설가의 표정은 감동 먹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후 지역색이 뚜렷한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선동렬은 또 하나의 족적을 남깁니다. 감독 데뷔 첫 해 한국시리즈 진출, 이어 2005년 과 2006년 거푸 우승으로 “스타 출신은 명 감독이 될 수 없다”는 경험칙은 물론 “호남 출신 감독은 영남에 와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악취 나는 편견도 보기좋게 바꿔 놓습니다.

‘무등산 폭격기’란 별명의 투수로서, ‘명 조련사’로서, 그리고 ‘인간 선동렬’로서 그는 한국 야구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신화, ‘롤 모델’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닙니다. 때문에 여기저기서 끙끙 앓는 소리가 쏟아져나오는 목하 한국 프로야구의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적임자 중 한 사람입니다. 아니, 그 무거운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분 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근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것을 끝내 고사했습니다.

그가 감독을 맡는다고 해서 본선에 진출해 금메달도 따고, 시름시름 한 한국 프로야구가 당장 원기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선동렬이란 상징마저도 지레 ‘독배’를 회피하는 한국 프로야구의 기막힌 세태와 위기 자각 지수입니다. 아사직전의 현대 유니콘스가 여전히 허공에서 헛 날갯짓을 해 독배를 폭탄주로 마셔도 시원찮을 판에 회피의 그늘로 기어 들어가려고만 한다면 그게 어찌 위기 극복의 울림과 메아리로 되돌 아오겠습니까. 포즈뿐인 한탄과 제자리를 맴도는 신세 타령, 허허한 공염불에 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구자겸 USA중앙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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