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536)-제86화 서울야화(3)|임시정부 반발속 미서 9월부터 실시준비|극동사령부 상륙 일인재산 몰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해방된지 며칠이 지나서 주렸던 배를 채우고 하루바삐 독립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25일 미국측 방송이 나왔다. 38선북쪽은 소련이 통치하고, 남쪽은 미국이 통치한다는 소식이었다.
또 미군의 일부가 인천에 상륙하였는데 남쪽에 있는 조선민중은 질서를 잘 지키고 9월초에 있을 미국군정사령부의 상륙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렇게해서 우리들은 국토가 둘로 쪼개진 것을 알았다.
여러가지 궁금한 일이 많았지만 어떻게 알 도리가 없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은 8월30일 일본에 도착해서 9월2일 일본의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동경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맥아더사령관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조선을 분할점령 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9월8일에는 서울에 미군극동사령부가 진주해 사군단장인 하지중장이 사령관이 되어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에 앞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발표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을 취임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좌익측이 하룻밤에 만들어 낸 조선인민공화국은 일반 국민들도, 미군정청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송진우를 중심으로 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에 그분들과 의논해서 나랏일을 결정하자는 태도를 표명했다.
9월 16일에는 송진우가 수석총무로 된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아널드 미군정장관은 일본정부와 일본인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미군정 소유로 한다고 발표하고 10월24일까지 일본인은 모두 조선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은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알몸뚱이로 일본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10월16일에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고 11월23일에는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주석과 김규식 부주석등 일행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10월부터 미국무부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암시해오더니 필경 12월27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의 5개년 신탁통치 실시를 결정, 발표했다.
조속한 완전독립을 바라보고 가슴설레던 우리에게 신탁통치 결정발표는 청천벽력같은 실망을 주었다.
사실 신탁통치는 국내에서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국제간에 논의된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후의 식민지 처리문제를 구상한 1941년께부터 한국문제는 논의되었었다.
1943년에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11월27일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 「적당한 시기」란 말속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뜻이 내포되었던 것이었다.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서는 이것을 알고 외교부장 조소묘의 이름으로 전후에 한국을 국제보호아래에 둔다는 것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김구주석도 기자회견에서 어떠한 국제 공동관리에도 반대한다고 하고 즉각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 임시정부의 신탁반대에 대해 미국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임시정부는 유엔 상임이사국에 대해서 해방일인 8월15일자로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시기」를 정전협정후 새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1년동안만으로 한정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무시되고 미국정부는 신탁통치를 45년 9월부터 실시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 정보에 어두웠던 것같다.
그때 정치지도자들은 삼상회의의 일부분인 신탁통치에만 관심을 가졌지 더 중요한 임시 통일정부수립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주의하지 않은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