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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제5부(6)|신라·고구려 유민이 관동 개척|수교관계 백제인은 근기에 정착|대화조정의 사민정책으로 집단촌 이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오사카에서 기차를 타고 동경으로 가던중 소전원(오다와라)역에서 완행으로 갈아타고 신나천현 중군소기(고이소)역에서 내렸다.
소기마을은 상모(사가미)만에 위치한 임해도시이므로 여름철에는 바다에서 휴가를 즐기려는 인파로 붐빈다.
주변경치가 빼어나고 아담해 고관·문인·재벌들의 주택·별장이 많이 들어선, 동경의 위성도시로 이름난 곳이다.
소기역에서 동쪽으로 10리쯤 가면 고려(고마)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의 옛지명은 고래(다카쿠)향이라고 했는데 「고래」는 고려(고마=고구려)사람이 와서 살았다(내주)는 사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실을 방증하는 다음과 같은 동가(관동지방의 노래)가 있다.
『범이 누워있는듯이 보이는 이름난 고려산이 동노(관동길)의 당원(모로코시가하라)에 있다 한다.』

<7·8세기 이미 정착>
이 동노에 「범이 누워있는 듯이 보이는 고려산」이라는 표현과 「당원」이라는 말이 외국을 가리키는 일본어의 상투어임을 생각할 때 동가가 읊어진 7, 8세기께 이미 고(구)려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또는 후세에 와서 고려를 일본어로 「고라이」라 읽고 같은 음의 「고래」라고 표기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라는 곳에 가면 길가에 고래신사라고 음각된 표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쪽으로 깊숙이 고려산기슭에 고려신사·고려사가 있다. 고래신사라는 명칭은 1897년에 개칭된 것이다.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명치시대였으므로 한국에 연유되는 고려를 고래로 바꿔버림으로써 이 신사·절의 유래를 말살하려고 한 일본인들의 속셈이 역력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면 고구려사람들이 언제, 어째서 일본으로 건너왔는가.
『일본서기』의 666년 10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신인 을상엄추등을 보내어 조공을 했다. 대사는 신인 을상엄추·부달상둔·이위현무고광등이다.』
이같은 기록은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없는 것으로 그 사실 여부를 알 길은 없다.
하지만 후기하듯이 「고광」이라는 인물이 일본에 살아남아 그와 그 후손들이 일본사에 이름을 남겼고, 또 그 일족에 연유되는 유적이 오늘날까지도 역력히 남아있으니 이 기록은 조작이라기보다 우리 문헌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일본서기』 기록전해>
그러면 이 『일본서기』의 기사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신」은 「신하」를 가리키는 말인지, 또는 「대신」을 가리키는 말인지 분명치 않다.
「을상·달상」은 관직이름인 듯 하나 고구려의 관명에는 보이지 않으니 역시 불분명하다.
「부」는 「대사」다음에 나오니 「부사」임이 틀림없을 것 같고, 「이위」는 필경 수종관의 입장으로 오게된 청년 외교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 「현무」도 관명인지 성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와 같은 고구려 사신의 관명이 『일본서기』편집자의 오기인지, 사신들의 위조인지도 알길이 없다.
어쨌든 고구려사신이 일본에 온 모양인데 조공한 이유, 사신들이 귀국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나·제·여 3국의 정치적 갈등을 살펴보면 그 이면을 이해할 수 있겠다.
고구려사신이 온 666년이라면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협공돼 멸망한 6년후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 9월이다. 이상과 같은 연대기로 미뤄볼때 666년10월 고구려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것은 신라를 견제해 고구려후(남)방의 안전을 도모하려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에 온 고구려사신이 귀국하지 않은 것은 조국의 정치적·군사적 붕괴상을 볼때 머잖아 조국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 귀국을 단념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물론 일본역사에 기록된 이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제·여 3국이 오랫동안 갈등했을때 난을 피해, 또는 3국이 통일된후 정치적 피신으로, 또는 해상에서 어로작업하다 유랑해 많이 일본으로 왔을 것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이러한 사람중 백제유민은 주로 근기지방(오사카주변)에 정착시켰고, 신라·고구려유민은 주로 관동지방(도쿄주변)에 정착시켰다. 이는 백제가 대화(야마토)조정과 연합국관계였던 반면 신라·고구려는 적대 또는 제3국관계였기 때문이다.
당시 관동지방은 변방의 황무지였으며, 이곳에 유민을 정착시켜 개발하려한 것이 대화조정의 사민(사민)정책이었다.
현무야광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히 알길이 없으나 일본 문헌에 고구려왕족으로 추대되어 703년 종오위에 오르고 「왕」이라는 성을 대화조정으로부터 받아 「고(구)려왕고광」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지방 외에도 고구려인들은 중군의 동북쪽에 위치한 고좌(다카쿠라)군에도 정착했음을 고좌라는 군명에서 알수 있다. 즉 고구려는 일어로 「고쿠리」라고 읽는데 「정쿠리」가 「고쿠라」로 와전, 같은 음의 「고좌」 또는 「고창」이라고 쓰고 이를 다시 훈독해 「다카쿠라」라고 읽게 된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일본서기』의 기록중 「상모국이(중앙정부에) 아뢰옵기를 고창(다카쿠라)군인의 여인이 세쌍의 남아를 낳았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상모국(현재의 신내천현)의 고창군이라면 곧 「고좌군」을 가리키니 고창군=고좌군=고구려군인 것이다. 또 한 예를 들면 일본에 도래, 정착한 고구려 사람의 후손으로 내량시대의 궁내대신경종삼위라는 고위에 오른 고창복신(다카쿠라 후쿠노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사람의 원래 이름이 고(구)려복신이었던 것이다.

<고좌군은 고구려군>
또 근세이전 중군서쪽에는 여능(요로기)군이 있었고 그안에는 번다(하다)향·여능향이 있었는데, 번다향은 도래한족인 기(하다)씨족이 번영한 곳이다.
이 번다향은 근세에 와서 번다야(하다노)시라는 행정구획명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요로기」라는 지명은 「유루기」라는 일본어가 와전된 말인데 「유루기」의 의미는 「명주같은 옷감을 물에 헹군다」는 말이니 필경 주씨족이 길삼해서 짠 견직물을 개울에서 헹군데에서 「유루기-요로기」라는 마을 이름이 됐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여간 이같이 해서 상모국에서는 상당한 수량의 견직물이 중앙정부에 공납됐다는 기록이 고문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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