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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유혈 부른 첫 반공·반소시위|신의주학생의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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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국후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기자 안성규기자

<발단>
1945년 11월23일 공산당평북도본부가 들어사있는 신의주 구법원건물을 오후2시가 조금 못 미쳐서부터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격』소리에 따라 함성이 시작됐고 공산당본부는 수라장이 됐다.
학생들은 3층까지 물밀듯 들어갔다.
3층 어딘가에시 소련장교의 권총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한 학생이 머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상황은 급변했다.
건물 지하실에서 나온 l백명정도의 무장보안대가 학생들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학생들의 뒤로 기관총소리가 들렸고 학생들이 피를 뿌리며 여기시기 뒹굴었다.
이날 공산당 도본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의주시내 공산당과 관계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학교 접수가 도화선>
이것이 소군정하에서 최초로 일어난 반소·반공시위 신의주학생사건이다.
이 사건은 해방초 소군정하에시 조금씩 형성되어가던 소련군의 만행과 공산당에 대한 반감이 곪아 터져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소군정이나 공산당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당본부까지 점거한 학생시위는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유혈진압도 불사했다.
사건 이후 조만식과 조선민주당 등 민족진영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공산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족진영과 공산당이 결별로 치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신의주에서 60리 떨어진 용암포의 집회에서 시작됐다.
사건 5일전인 11월18일 용암포 구세국민학교 교정에서는 민족진영의 청년조직체인 고려청년동맹 주최로 독립촉성시민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한 학생대표의 공산당비판연설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당시 집회에 참석했던 1공업학교 3학년생 이도명씨(64·대광국민학교교장)의 증언.
『학생대표로 나선 신의주동중 이청일 학생은 당시 용암포의 현안이 되고 있던 공산당의 수산학교 접수문제를 거론했습니다. 학교를 돌려달라고 했지요. 수산학교는 이 지역의 유일한 학교였거든요. 그런데 이 학교가 공산당에 접수되는 바람에 「아무리 그래도 교육기관을 점령하면 되는가」라는 반감이 조성된 거예요. 공산당은 그때 소련군행패를 감싼다고 미움을 받고있었어요.』

<세 갈래로 나눠 공격>
청중들의 호응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계속되는 이씨의 증언.
『그 말이 나오니까 당사자인 수산학교 학생들이 먼저 호응을 했고 다른 참가 학생들도 박수를 쳤습니다. 시민들도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용암포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용흡을 만나서 따지자는 의견이 나왔죠. 이용흡 본인의 잘못이 많아서라기보다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눈총을 사고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이용흡을 만나러 나섰다.
보안대의 제지나 소련군의 모습은 없었다.
그런데 이용흡이 신의주로 도망간다는 말이 전해졌다.
학생 수십명이 신의주로 가는 길목에 장작을 쌓아놓고 기다렸다.
이도명씨의 증언.
『우리가 기다리는데 멀리서 한 무리가 꽹과리를 치면서 와요. 1백명정도의 노동자·농민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망치나 몽둥이를 쥔 채 다가오는 거예요. 이들은 가까이 오더니 다짜고짜 우리를 두들겨 패기 시작하는 거예요. 시민들은 발을 굴렀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들의 폭력행사로 비명이 부상하고 말리는 용암포 제1교회의 홍석황 목사가 타살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틀정도 소동 끝에 용암포는 일단 진정됐다. 그러나 신의주일대에 긴장이 감돌았다. 불길은 서서히 신의주쪽으로 번지고있었다.
사태의 추이를 보던 학생들은 일단 첫 대응으로 22일 현장에 조사반을 보내고 결과에 따라 대응을 하기로 했다.
평북학생회가 이를 주도했다. 신의주소재 6개 학교 학생회연합체인 평북학생회는 45년11월3일 결성돼 있었다. 6개 학교는 동중학교(동중), 사범학교, 상업학교, 평안중학교(평중), 신의주농업학교, 제1공업학교(1공), 제2공업학교(2공)다.
당시 평북학생회 간부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전평중학생회 회장 김인덕씨(66)의 회고.
「11월22일 평북학생회의 연락에 따라 13명의 학생간부가 공산당본부가 제공하는 차를 타고 용암포로 갔습니다. 공청(공산주의 청년동맹)간부와 공산당선전부요원이 같이 갔지요. 용암포에는 저녁에 도착했는데 농민·노동자집회에 끌려 다니다 보안서에 도착했습니다. 갔더니 소련군 소령이 「너희들 잡아 넣으리고 했는데 이번은 봐준다. 다음에는 용서 없다」고 으름장을 놔요. 오전1시까지 그런 식으로 위협만 당하고 아무도 못 만났지요.』
그런데 용암포학생들로부터 만나자는 비밀쪽지가 왔다.
오전1시30분쯤 용암포 시흥식당에 모인 이들은 용암포학생들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요청에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김씨는 후에 알았지만 이 시간에 신의주에서는 조사단의 보고내용과 관계없이 거사를 한다는 결정이 내려섰다.
23일 새벽 1공 학생간부 최낙도의 집에서 열린 평북학생회회의에시 조사단이 귀환하면 즉각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됐다.
23일 오전10시에 한 하숙생의 집에서 다시 열린 비밀회의에서 계획이 거듭 확인됐다.
사범학교와 2공은 공산당본부를, 동중과 1공은 도보안서를, 평중과 상업학교는 시보안서를 맡아 공격하기로 했다.
거사시간은 오후 2시.
공산당본부를 공격했던 당시 2공의 2학년생 황창하씨(63)의 기억이다.
『약8백명의 학생이 갔어요. 가다가 자갈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가자마자 공격이 시작됐어요. 「진격」소리에 우리들은 단숨에 3층까지 올라갔지요. 그때 장원봉이라는 학생이 희생됐습니다. 소련군 장교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시 죽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지하실에서 보안대원들이 올라오더니 우리를 개머리판으로 닥치는 대로 후려 갈기는 거예요. 도망가기 시작했지요. 3층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뒤로 따발총을 마구 쏘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군요. 모두들 정신 없이 도망갔습니다.』
다른 곳도 비슷했다.

<20분도 안 돼 끝나>
도보안서 공격에 참가했던 이도명씨가 전하는 상황.
「가니까 철문을 굳게 참근 채 보안대 요원들이 따발총을 들고 경계를 하더군요. 곧 공격을 시가했습니다. 먼저 소련반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의 선창으로 「스탈린 후라(만세)」라고 외쳤죠. 그러더니 「진격」이라는 말이 들려요. 담을 넘기 시작했어요. 나도 막 넘으려는데 총소리가 들려요. 공포였어요.. 다시 용기를 내고 담을 넘으려는데 이번엔 진짜 따발총소리가 「따따따따」하고 들려요. 학생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죠. 옆을 보니까 어떤 학생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더라구요. 공격시작 20분이 채 안됐을 겁니다.』
김인덕씨는 『시보인서를 공격하기로 한 평중은 늦게 출발했는데 가는 길에 소련제 야크비행기의 스칠 듯이 낮게 지나치는 위협비행에 놀라 흩어져버렸다』고 했다.
결국 학생들의 거사는 사전에 대비하고 있딘 보안대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태는 심각했다. 전 신의주학생사건기념사업회회장 김인덕씨에 따르면 이날 15명이 사망하고 1백68명이 부상했다.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회장 오제도 변호사)가 발행한 『신의주학생반공의거 제40주년기념회지』는 이날 24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3백50명의 학생이 부상했다고 집계하고 있다.

<뒤처리>소군정서 김일성 신의주급과 유화작전|"도당간부 등 처벌하겠다"공언 흐지부지
학생시위가 끝나자마자 체포와 검거의 시풍이 몰아닥쳤다.
첫날 1천여명이 체포됐다. 김씨의 증언.
『잡힌 학생은 보안대·시인민위원회 등에 모아두었다가 저녁에 모두 도보안대로 집결시켰습니다. 거기서 모두 내보냈고 다음날 아침에는 나를 포함해 7명만 남았죠. 그 사람들은 게페우(소련비밀겅찰)로 넘겨져 도보안대 유치장에 감금됐어요. 거기서 고 함석헌 선생과 같은 방에 있었습니다. 고문을 당하거나 하기는 않았어요.
「누가 주동자냐, 주동자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같은 것만 물어보다 1주일만에 석방시키더군요. 나가는데 소련군들이 「김일성 장군이 선처해 내보낸다」고 그러더군요.』
의외로 소군정의 대응은 유연했다.
소군정은 또 김일성을 신의주에 파견하는 등 유화책을 폈다.
김일성은 동중에서 시민대회와 학생대표 간담회를 잇따라 가졌다. 당시 사범학교 4학년생으로 학생회간부였던 임창수(66)씨의 증언.
『사건 1주일후로 기억합니다(김인덕씨는 27일). 김일성이 동중교정에서 시민대회를 열었습니다. 한 2백명정도 모였을 거예요. 양복을 입은 젊은 청년모습의 김일성을 대개는 환영했고 잘 생겼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신의주 우익지영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투쟁을 했던 분」이라고 김일성을 소개했습니다.
김일성은 「진짜 공산주의자는 나쁜 짓을 안 한다. 가짜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한다. 도당책임자와 간부 책임자들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두어시간 열변을 토하더군요.
다음날에도 또 동중강당에서 학생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지요. 김일성은 먼저 자신이 압록강을 넘나들며 싸웠던 얘기 등을 한 뒤 도당가부들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벌을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두시간정도 혼자만 연설했죠. 흔히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이 「김장군도 공산주의자」냐고 질문을 하니까 김일성이 「그렇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공개적으로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어 12월 10,11일에는 한달전에 입북했다 무장해제당하고 쫓겨났지만 소군정의 부탁을 받은 조선의용군 압록강지대의 김호 지대장이 주최하는 평북학생좌담회도 열렸다.
학생간부, 평북지사, 김호 지대장, 보안대장 한웅, 기타 사회단체 등의 연석회의였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있다면 발포명령자를 알아내는 정도였다..
김씨의 증언.
『우리들이 「누가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냐」고 하니까 보안대차장인 차정삼이 일어나 「1공의 백모교사가 시위계획을 알려와서 소련사령부에 연락을 했더니 평화시위면 놔두고 아니면 쏴라」고 했다는 거예요.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한웅은 가만히 있고요. 차는 후에 책임추궁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월남했다가 우익단체의 테러로 48년 사망했고 한웅은 46년초 책임추궁 당해 자리에서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유화책이라 했지만 아무 것도 매듭이 지어진 것이 없었다. 김인덕씨에 따르면 학생들에 대해시눈 여러 차례 재조사 끝에 2공과 사범학교의 학생위원장인 황신하와 한형규 두 명이 「공산당본부 점령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갔다(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는 2백명이 유형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생들의 시위는 소군정과 김일성이 계획하는 북한사회주의화 프로그램에는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일과성 사건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오히려 공산당의 지배를 강화하는 구실이 됐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평양 및 함흥의 학생시위에서 『신의주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가 나왔듯이 신의주학생사건은 북한공산정권의 지우기 힘든 상처로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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