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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과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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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사람의 혈관 길이는 장장 10만㎞. 한 줄로 편다면 지구를 두 바퀴 반 감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에서 분출된 피가 온몸을 돌아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데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수축.확장기 혈압이 80~120mmHg인 정상인의 경우다.

비정상적인 혈압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전후 처리 과정의 일화. 1945년 4월 뇌출혈로 급서(急逝)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0년 넘게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사거(死去) 두 달 전 영국.소련의 정상과 머리를 맞댄 얄타 회담에서 그의 쇠진한 모습은 역력했다. 비만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처칠 영국 총리도 여독을 풀지 못해 회담 내내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열강의 힘겨루기는 스탈린의 소련 쪽으로 승부가 기울었다는 게 사가(史家)들의 평가다.

하지만 얄타에서 미소 지은 스탈린 자신도 고혈압의 굴레를 떨치지 못했다. 8년 뒤 73세 나이에 그 합병증인 뇌혈전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말 없는 살인자' 고혈압은 지위고하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서른 살 이상 한국인 넷 중 한 사람꼴로 고혈압 환자다. 고혈압 관련 질환은 장.노년층 사망 원인의 으뜸을 다툰다. 자각 증상조차 느끼지 못하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시나브로 찾아와 거꾸러뜨리는 자객 같은 존재다.

의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꼽히는 '혈액 순환론'은 '증기기관의 발명' 못지않게 영국이 뽐내는 혁명적 발견이다. 17세기 초반 윌리엄 하비라는 의사의 공로다. '피는 간에서 생성돼 심장을 통해 온몸에 퍼져 소멸한다'는 고대 의성(醫聖) 갈레노스의 학설을 1400년 만에 뒤엎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혈압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또 나왔다. 유럽 16개국 1만50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행복은 부유함보다 혈압 수치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도를 혈압으로 재 보면? 언뜻 대량 실업, 빈부 격차, 경제 양극화, 국정 마비, 무한 경쟁처럼 '혈압 올라가는' 말들이 떠오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최고라니 긴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뿐인가. 맵고 짠 음식에, 세계 2위 술 소비국인 데다, 비만.노령 인구는 늘어만 가니 혈압 수치 떨어지기란 더욱 난망. '사회적 고혈압'이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도지기 전에 하비 같은 명의(名醫)가 등장해 용한 처방이라도 내려 주길 바라야 할까.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