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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없는 북한의 핵카드(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남북한관계 정립을 위한 합의서를 단일 문건으로 만들기로 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평양 총리회담에서 드러났던 다른 측면을 우리는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실질관계의 개선보다는 북한의 일관된 대남정책 노선을 유지하고 관철시키려는 끈질긴 노력에서 나타난 부정적 측면들이다. 회담 기간중 북한 매체들의 자기네 주장만 알리는 일방적 보도,회담이 끝난뒤 성과가 없었다며 남측을 비난하는 태도 등은 익히 보아온 상투적인 태도들이다.
이러한 상투적 태도 중에서 북한의 완고한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연형묵 총리의 기조연설 전체의 맥락과 그중의 「조선반도의 비핵지대화에 관한 선언」이다.
연총리의 연설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어떻게 하든지 미국을 북한의 대화상대로 끌어 들이겠다는 집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비록 남한과 대화는 하되 우리의 어깨를 넘어 미국과 직접 협상하겠다는 종래의 태도를 조금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핵화에 관한 선언」도 그런 면에서 예외는 아니다. 고도의 정치·외교적 책략과 선전효과를 이 제안은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책략이란 이 선언을 통해 국제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 북한의 핵사찰 문제를 최대한 회피하고 지연시키자는데 있다.
북한이 핵사찰수용 조건으로 거론했던 한반도의 미국 핵무기철거 문제는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이용할 속셈도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전술핵의 철수를 발표함으로써 북한의 핵카드는 그 효용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미국 핵무기철수와 연계시켜 핵사찰을 수용하겠다던 국제적인 약속 때문에 북한은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남북한의 동시 핵사찰 주장이라는 새로운 조건이다.
평양회담 벽두부터 비핵화선언을 들고 나온 것 역시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11월의 한미 안보회의,12월의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때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남한의 핵정책에 대비해 선제공세를 벌이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핵사찰문제를 지연시키는 수단으로서,자기네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축적용으로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총리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겠다고 북한측이 밝힌데서 북한의 그러한 전술적 속셈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핵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북한이 생각하는것 처럼 이러한 정치적 계산이나 선전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핵사찰문제에 관한한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의 국제조약상의 의무이기 때문에 남한의 핵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의 핵무기 철거가 확정된 상태에서 그러한 주장은 궁색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이 그토록 추구하는 미국과의 직접대화,일본과의 수교 협상진전을 위해서도 그들의 핵카드는 효용이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핵사찰을 받아 들이면 관계개선용의가 있다는 미국의 정책을 활용하는 편이 오히려 북한의 대미,대일접촉 희망을 실현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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