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그라운드의 '얼짱 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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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운동선수 가운데 히가시오 리코(東尾理子)라는 여자 프로골퍼가 있다. 올해 27세인데 소위 '얼짱'이다. 얼굴이 탤런트 김희애와 KAL기 폭파사건의 '마유미'(김현희)를 합쳐 둘로 나눠놓은 것 같이 생겼다. 피부가 뽀얗고, 체구도 1m60cm.50kg으로 아담하다. 거무튀튀하고 우람한 선수들이 득실거리는 필드에서 유난히 눈에 띈다. 게다가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감독을 지낸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의 딸이라는 후광도 업고 있다.

1999년 프로로 데뷔한 후 그녀는 일본 매스컴, 특히 TV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일본 TV들이 골프 경기를 중계할 때 보면 거짓말 좀 보태 전체 방영되는 화면의 절반 가까이가 그녀로 채워졌다. 선두권을 달리는 선수들의 치열한 우승 경쟁과 별개로 그녀가 샷을 하고, 물을 마시고, 캐디와 얘기하고, 웃거나 찡그리는 모습까지 다 카메라에 담겼다. 헤드커버나 캐디백의 장식물까지 툭하면 줌업됐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경기 중 유난히 중계 카메라를 의식했다. 일반 시청자가 화면 상으로 보기에도 그녀가 제스처 하나, 표정 하나에까지 일일이 신경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마추어 시절 부동의 톱이었던 그녀는 프로 입문 이후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기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경기를 하면서 그렇게 엉뚱한 데 신경을 많이 쓰니 성적이 좋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성적이 계속 저조하자 TV의 대접도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까지 중계 화면을 독점하다시피는 못한다.

인터넷에서 일기 시작한 얼짱 열풍이 급기야 그라운드와 코트에까지 불어닥쳤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속속 '스포츠 얼짱'을 선정하고, 상당수 언론도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다. 아예 독자적으로 스포츠 얼짱을 발굴해 보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잘 생기고, 예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경기력이 뛰어난 선수보다 더 대접을 받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최근 있었던 2004년 여자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1위 지명자 정미란 선수가 아니라 스포츠 얼짱으로 뽑힌 신혜인 선수였다. 프로축구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최다 득표한 선수는 올 시즌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지만 생김새 하나만큼은 여자 빰치게 예쁜 이관우 선수였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모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대회를 앞두고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도 사상 최초로 대회 3연패를 노렸던 박세리나 세계 제1인자 아니카 소렌스탐이 아니라 '얼짱' 안시현 선수였다. 롤러 스케이트는 비인기 종목이지만 깜찍한 궈채이 선수만큼은 인기가 상종가다.

물론 운동선수의 덕목이 경기력 하나뿐일 수는 없고, 그것뿐이어서도 안 된다. 옛말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미남.미녀 선수에게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스포츠의 본질은 힘과 기(技)의 경연이다. '얼짱'이라는 이유로 매스컴과 팬들이 정도 이상으로 대접해 준다면 이는 분명 바람직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물에서는 수영 잘 하는 사람이, 무도장에서는 춤 잘 추는 사람이 하이라이트를 받는 게 옳다. 가수라면 '노래 짱', 배우라면 '연기 짱', 선수라면 '운동 짱', 직장인이라면 '업무 짱'을 최고로 쳐주어야 한다. '얼짱 신드롬'은 젊은 세대의 이미지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본말이 전도될 수는 없다. 히가시오 리코의 실패 사례를 다 함께 되새겨봤으면 싶다.

김동균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