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투자자 등 돌리고 외국계에 밀리고…쪼그라드는 '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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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주식시장이 8개월째 상승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내 투신운용사와 자산운용사들이 굴리는 주식형펀드에서는 돈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 반면 외국인 투자자(대부분 외국계 펀드)들은 줄기차게 주식을 사들여 국내 증시의 외국인 투자비중이 40%선을 훌쩍 넘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 투자자들만 재미를 보는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국내 투신.자산 운용사들의 주식형펀드(채권이 50%까지 들어가는 주식혼합형 포함) 잔액은 11월 말 현재 22조4천7백억원 규모로 지난 4월 이후 5조2천3백억원이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에 외국인들은 15조원어치가 넘는 국내 주식을 순매수했다.

외국 금융회사들은 국내 펀드(자산운용)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의 푸르덴셜이 최근 현대투신을 인수하는 본계약을 체결했고, 피델리티도 한국 진출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외국인이 국내 투신사를 인수하게 되면 여기에 돈을 맡긴 국내 고객들의 자산도 외국인 손에 좌우된다.

증권연구원 고광수 연구위원은 "국내 투신사들은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는 상황에서 외국 대형 투신사들의 공격까지 받아 한마디로 '사면초가'의 모습"이라며 "변신을 서두르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초한 위기=국내 투신사들이 불신의 늪에 빠진 것은 대부분 장기투자의 원칙이 없이 단기 시세만 좇아 고객돈을 굴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주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적잖은 손실을 끼쳤다.

알파자산운용의 박용국 상무는 "외국의 대형 투신사들은 '가치투자''성장투자' 등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장기적으로 시장에 접근하는 반면, 국내 투신사들은 원칙없이 시장의 유행을 따르는 '모멘텀'투자에 열중해 왔다"고 꼬집었다. 朴상무는 "그 결과 대우와 현대, 카드채 부실 등의 덫에 대부분 걸려들어 투자자들의 불신을 자초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PCA투신의 강창희 투자교육연구소장은 "한국의 펀드는 90%가 만기 1년 이하"라며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투자신탁이 아니며 단기 매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기가 짧다 보니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러다 보니 투자자들은 더욱 단기로만 돈을 맡기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미래에셋 등 일부 운용사가 정석 투자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업계 전체의 불신에 파묻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투신사가 난립해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문제다. 외환위기 직전 30개였던 국내 투신운용사는 현재 42개로 늘어났다. 이는 국내 은행이 외환위기 전 26개에서 13개로 줄어든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투신사들은 경쟁이 심하다 보니, 고객들에게서 받는 운용수수료를 자꾸 내려 경영이 부실해지고 있다. 경영이 나빠질수록 투신사들은 고객들에게 장기 성과를 인정받을 여유가 없어지고, 단기 성과에 더욱 급급하게 된다.

◆시장은 커진다=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펀드시장은 앞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LG경제연구원 박상수 책임연구원은 "미국 등 선진국 사례를 보면 사회가 고령화될수록 미래에 대비한 금융자산 투자가 늘어나며, 특히 간접 투자대상인 펀드시장이 크게 확대된다"면서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말 현재 가계의 금융자산 중 펀드(채권형 포함)의 비중은 12.3%인 데 비해 한국은 6.4%로 절반에 머물고 있다.

금융연구원 강종만 선임연구위원은 "올해 우리나라 가계의 금융자산은 1천조원을 넘어서 세계 10위권에 도달했다"며 "외국의 투신운용사들이 한국에 본격 진출하려는 것도 시장의 잠재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은 "투신운용사가 외국인 손에 넘어가면 고객의 돈으로 투자된 주식의 의결권까지 외국인에게 넘어간다"며 "이는 자본주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만큼 국내 투신운용사들은 시장을 지키기 위한 변신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르덴셜의 현투증권 인수로 외국계 투신운용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40%에 이르게 됐다.

한국투신운용 권성철 사장은 "국내 투신운용사들은 대형화와 특화된 투자전략으로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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