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정통부는 '협회 제조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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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차라리 따뜻한 밥을 주는 감옥으로 가고 싶다."

단돈 2백원을 훔쳐 스스로 '한국판 장발장'의 길을 택한 한 소외시민의 '따뜻한 밥'에 대한 유혹은 추운 겨울을 맞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정부가 먹고 살 거리를 찾기 위해 내놓은 대안이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개발이다. 과기부.산자부.정통부 등 3부처가 요즘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성장동력산업 추진계획은 '앞으로 먹고 살 아이템'을 찾아내자는 국가적 '부가가치 확보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위성이나 방향은 일단 옳다고 봐야 한다. 전략설정을 위한 부처 간 경쟁이 활성화된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표출된 성과지상주의나 독점을 위한 이기주의, 그리고 이 때문에 빚어진 부처 간 과당경쟁은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하다.

특히 여기저기에서 "정보통신부는 협회 제조기인가"라고 수군대는 잡음이 들려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정통부는 지난 8월 30일 지능로봇산업협회를 만든 것을 필두로, 텔레메틱스산업협회(9월 1일), 차세대PC산업협회(9월 5일), 디지털방송산업진흥협의회(9월 30일), 홈네트워크산업협회(10월 1일), 디지털콘텐츠미래포럼(10월 1일), SoC산업협회(10월 31일) 등 무려 7개의 산하 협회를 설립했다.

업계의 자발적 공감대가 형성돼 실무 기구인 협회로 탈바꿈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아무리 빨라야 2년 내지 3년은 걸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정통부가 이들 7개의 협회를 '관주도'로 설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개월. 디지털콘텐츠미래포럼과 홈네트워크산업협회라는 두 개의 협회는 같은 날인 10월 1일 문을 열기도 했다. 새로 생긴 한 협회의 장을 맡게 된 인사는 "어느 날 갑자기 정통부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했다가 얼떨결에 감투를 쓰게 됐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정통부 산하에는 전자산업진흥회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라는 기존의 조직이 있다. 한 업계 중진은 "최근에 생긴 7개 협회와 이들 기존 협회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무엇엔가 홀려 벼락치기와 졸속으로 추진된 협회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적지 않다. 협회당 최소 운영경비는 3억원이 넘는다. 그러니 새로 만든 7개 협회 운영을 위한 사회적 비용은 줄잡아 연 20억원이 넘는다. 그 경비를 정부가 지원한다면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것이고 만약 업계 몫이라면 기업들은 '추가적' 준조세를 부담해야 한다.

국가 성장동력의 원천은 기업이다. 정통부와 그 산하 협회들이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상품화할 수 있는 동인을 제공하는 '보조자와 지원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의욕에 찬 고객이 생기기도 전에 가게부터 차리고 회전의자 만들기에 바쁜 모습은 앞뒤가 뒤바뀐 일이다. 특히 어떤 특정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행위가 관주도로 이루어지는 경우 국가 간 통상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기업들의 '좋은 아이템 찾기'는 산에서 산삼을 캐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니 정부의 여러 부처가 동시에 나서서 기업들의 '산삼 찾기'를 도와주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같은 부처 간 경쟁은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형태의 것이어야 한다. 행정독점을 위한 '업계 줄 세우기'나 한국판 '경제 게리맨더링'은 사회적 반목을 부추길 뿐이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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