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수준 인정받을 때까지 매일 한 장씩 건물 스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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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송도신도시 컨벤션센터 설계 모형 앞에서 설명하고 있는 한지섭씨. [사진=안윤수 기자]

인천 앞바다. 매립된 갯벌 위에 큰 배가 뒤집혀 있는 듯한 건축물 골조가 서 있다. 미국의 세계적 건축설계업체 KPF(Kohn Pederson Fox Associates)가 설계를 맡은 송도 컨벤션 센터의 건설 현장이다.

이 곳의 설계 책임자는 한국인 한지섭(38) KPF 이사다. 그는 인천경제자유구역 내 송도신도시의 마스터 플랜은 물론이고 서울의 동부파이낸스 등 KPF가 설계를 맡은 여러 건축물의 수석 디자이너다.

"한국엔 산이 많은데 송도는 지평선만 보이는 뻥 뚫린 곳이어서 산이 겹쳐 있는 형체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는 한국에서 짓는 건축물엔 늘 한국적 미를 반영하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 회사가 설계를 맡은 건축물이지만 한국적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컨대 서울 테헤란로의 동부파이낸스 건물 앞에는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벽이 있고, 2월 착공한 동북아 트레이드 타워의 로비.엘리베이터 등에는 짚신들이 꼬여 있는 무늬나 팔만대장경 문양이 들어간다. 그는 KPF 디자인팀과 함께 경복궁, 비원, 경주 안압지 등을 둘러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한 이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가 코넬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하바드대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들어설 프리덤 타워를 설계한 SOM에서 1년 일한 뒤 KPF에 합류했다. KPF에선 2년 만에 선임 디자이너로 승진했다. 건축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뉴욕에 본사를 둔 KPF는 서울 강남에 건축 중인 삼성 본관, 일본 도쿄의 롯폰기 타워, 상하이의 최고층 빌딩인 WFC 등 세계 각지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많이 맡고 있다.

실력을 인정받기까지 그는 언제나 구체적인 단기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한계를 계속 시험했다고 한다. 새 회사에 입사하면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하루에 멋진 스케치 하나를 완성하겠다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1년 뒤에는 스케치가 어디에도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 해지더군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지독한 자기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한 이사는 한국 건축계에서도 머지않아 세계적인 대가가 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무 능력과 영감이 외국인에 비해 탁월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이 외국에서 배운 것을 한국인 건축가들과 최대한 공유하는 계획을 짜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 이름을 고집한다. 외국인들이 처음엔 발음하기 힘들어 하지만 나중엔 오히려 잘 안 잊어버리기 때문이란다.

원동희 중앙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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