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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전 부총리가 본 중국의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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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갈주패댐 "위용">
장강이 삼협의 동쪽끝에 있는 남률관을 지나서 호북평야를 나오게되면 3백m밖에 되지 않던 강폭이 한꺼번에 2천2백m로 확대된다. 인구 4백만명의 신도시 환창시에는 세계 최대급의 갈주패댐이 건설돼 있다.
무한으로 가는 배행기 시간이 오후7시로부터 오후9시반으로 변경됨으로써 이 댐과 부속시설, 그리고 이곳의 명승지인 삼유동을 한번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댐은 발전량으로서는 세계 제3위라고 하지만 홍수방지·해상운송과 관개 등의 용도를 겸한 다목적 시설을 합치면 그것은 세계 최대급이 아닐까 생각된다. 1970년에 건설을 시작해 완공하는데 18년이 소요되어 겨우 1988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에는 하루 5만명의 인력이 동원됐다고 하니 이 댐은 현대판 만리장성이라 할만하다. 기관실의 입구를 지키는 보초군인이 우리에게 선선히 들어가 보라고 한다. 컴퓨터로 조정된다는 댐의 여러 기관을 안내원 아가씨가 자랑스럽게 설명해준다.
중국은 앞으로 이보다 상류인 삼협에 보다 더 큰 다목적 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장강삼협수리추뉴」라는 것이 이것이다. 설명서에 의하면 지금 계획은 완성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다시 한번 그 세목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이 댐이 건설되면 삼협은 모두 물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벌써부터 아쉬운 생각이 든다.

<「캐비어」상어 양식>
양자강에는 「캐비어」라는 알을 생산하는 중국 상어(위)가 서식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물고기는 길이 약4m, 무게 5백㎏에 달하는 대어인데 그 가죽은 악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고 한다. 댐의 건설과 더불어 이 고기의 자연서식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금 인공으로 부화시켜 양식하고 있다. 이에 관련된 비디오와 그 고기의 실물 등을 보여주는 연구소에는 나름대로의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이러한 고기가 사는 양자강은 참으로 놀라운 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의창에는 장강과 하뇌계와 마주치는 뾰족한 절벽으로 된「반도」가 있다. 그 이름이 삼유동, 그 유래는 당대의 백거역와 그의 동생 백항간이 그곳을 통과하던 친우 원진과 여기에서 만나 넓고 시원한 동굴 속에서 밤을 지새며 시를 지은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후 송대에 와서 명상 구양수가 이 곳의 적수를 지낼 때에 「지희정」을 지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정자들이 군데군데 있어 방문객들이 천하의 절경을 즐길 수 있게돼 있다. 여기에는 또 촉나라의 장비가 군대를 훈련시킨 터가 있다. 거기에 장비의 험상궂은 조각상이 유유히 흐르는 장강을 내려다보면서 호령하고 있다. 놀러온 사람들이 줄지어 조각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장비훈련소 옛터>
이 나라의 다른 명승지도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거의 모든 암벽에는 역대 명인들의 이름과 그들의 시문이 새겨져있다. 동굴 속에도, 그 입구에도, 계단의 좌우에도 있다. 소동파, 황산곡, 육방옹 등….그저 이름만 보면서 나머지는 다 본 것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밤 10시에 무한에 도착하여 비행장에서 가까운 달강빈관에시 하루를 묵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복주로 향해 떠난 것이 이튿날 아침 9시40분. 복주는 대만의 맞은 편 복건성의 수도로서 현재 광동성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가장 경제발전이 빠른 성중의 하나다. 우리의 관심중 하나는 이 성은 다른 성에 비하여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있었다. 또 이성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학자인 주자가 탄생하고 활동한 성이기 때문에 나는 이 성의 오지를 볼 겸 주자의 유적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정박사의 말에 의하면 이 성에는 틀림없이 대만사람들의 돈이 많이 들어와 해안지방에는 돈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 성을 살펴본 결과 그의 예상이 대체로 맞다는 것이 확인됐다. 런던 이코노미스트지의 최근호에 의하면 복건성의 경제는 최근 10여년 동안 해마다 10%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영어를 썩 잘하는 양씨라는 안내원은 우선 우리를 명대의 장군 척계광을 모신 척공사로 안내했다. 척계광은 마치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그랬듯이 이 지방을 괴롭히던 왜구를 쳐부숨으로써 군인으로서의 용명을 날렸다.
일본의 해적들은 멀리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간단없이 이 지방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무장한 그의 소상(찰흙으로 만든 인물모형)을 모신 사당은 중국의 다른 모든 사당과 격식이 비슷하다. 사당 앞에는 아름다운 반석이 첩첩 쌓여있는데 그 사잇길을 노송이 짙은 그늘로 덮고 있었다. 여기는 옛날부터 외적을 많이 접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돌에 새겨져있는 문구에도 역력히 나타난다. 애국시인 욱달부의 시와 1936년의 그의 글씨「사소륜」, 공전치욕, 차아국인, 하시 전설」(사성이 함몰했으니, 일짝이 없던 치욕이다. 아아, 우리나라사람들, 언제나 설욕하노)이 그의 비창한 심정을 말해준다. 척공사 옆에는 아름다운 백탑이 있다. 그 내부의 1백60계단을 올라가서 복주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백탑을 내려오니 서화전시회가 열려있다. 중국이 인민공화국으로 된 이후 좋은 붓글씨가 귀해진 듯 한데 이 전시회에는 그래도 수준급의 작품이 더러 있는 것 같았다. 값도 대단치 않은데 기념으로 하나쯤 가지고 올 것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된다.
점심을 마치고 주자의 탄생지 우계현으로 떠난다. 우계는 여기에서 산길로 약 2백50㎞나 된다고 한다. 나는 책에서 거기가 주자의 탄생지인 줄만 알고 있을 뿐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안내원 양씨는 우계현이란 지명조차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여하튼 일제 도요타차가 갑강을 따라 상류를 더듬어 올라간다. 갑강은 그 양쪽을 따라 언덕의 경치가 아름답다. 아열대지방이라 도처에 바나나나무가 있고, 길가에는 군데군데 수박 무더기가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차는 갑강을 작별하여 산길로 접어든다. 길가의 산에는 약 6∼7년생쯤 돼보이는 귤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지난 78년의 자유화정책이후 이 귤나무들이 심어졌다는 것이 분명했다. 농민은 이제 농업생산의 증가를 위해 경제원론에시 가르치는 두가지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경작면적을 늘리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경작지에 인력과 비료를 더 많이 투입하는 방법이다. 복건성에 온 이후로 우리가 본 거의 모든 귤밭은 새로 개간된 것처럼 보였고, 귤밭은 나름대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우계현으로 가는 도중 우리는 인적도 드문 많은 산을 넘었다. 그 험준한 산길이 일부분만 빼놓고 대부분 잘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이 지방의 무덤이었다. 사천성 성도부근에서 거의 한국무덤과 같은 모양의 무덤을 몇개 본 후로는 무덤이라고는 하나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복건성에 와 보니 산의 군데군데에 새로운 무덤이 대단히 많다. 무덤의 모양은 「범」자형. 범자의 중심 점 있는 곳에 작은 비석이 있고 그 앞에 가로 횡석이 놓여있는데 그 밑에 관상이 놓여있는 듯 했다. 범자의 모든 부분은 모두 회·석희, 또는 시멘트로 싸바르고 가장자리는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다소 높게 벽이 쌓여져 있다. 대부분 무덤의 비석 위에는 「복」자가 마름모 모양 안에 새겨져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 밖의 부분은 모두 평토다. 작년에 나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해협 지방에서 이와 똑같이 생긴 중국인들의 무덤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이 지방사람들이 그 곳으로 간 것 같다. 무덤의 자리는 풍수설에 의하여 선택된 것 같지는 않다.

<복건성 신묘 많아>
이 지방에 이렇게 새 무덤이 많다는 것은 분명 지방민의 소득이 높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득이 높아지면 무덤부터 가꾸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새 무덤이 늘고 있는 배경에는 행정력의 한계라는 사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정부의 방침은 화장을 적극 권장한다고 하는데, 이 지방에는 이렇게 매장이 성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내원 양씨는 이 지방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그러니 인민정부로서도 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민정부가 어느 정도 양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계가 가까워짐에 따라 산에는 나무가 많아지고 나무가 많은 탓으로 농가의 규모가 커진다. 중국의 다른 지방에는 농가라 해도 모두 벽돌집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농가가 목조 2층집이다. 큰집은 중앙부분이 마루로 되어있고 양편으로 1층과 2층에 방이 각각 4개내지 6개 있다. 초가집은 전혀 없고 모든 집이 검은색 기와집이었다. 어떤 집을 막론하고 울타리도 없고 담도 없다. 마치 서양집 같다. 이것은 혹 도적이 적다는 얘기가 될는지 모른다. 이 한적한 산골에 빈부의 격차도 없고 따라서 도적이 성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우계시내의 어떤 관청 게시판에 누구누구가 강간 및 강도 혐의로 붙잡혔다는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주자와 같은 뛰어난 대학자를 낸 이 고장도 이미 요·순시대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침내 여기가 우계라는 표지가 나왔을 때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막상 여기에 오기는 왔지만, 여기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차안에 있는 네사람 중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내원을 원망할 수는 없다. 이런 곳을 가보자는 요청을 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계는 꼭 우리 나라의 강원도 인제읍과 같은 곳이었다. 그저 긴 계곡에 냇물이 흐르고 그 양쪽언덕에 작은 마을들이 전개돼있다. 현전체 인구는 약35만명. 어디를 보든지 주자와 같은 거인이 날만한 지형은 아니다. 「인걸은 지령」이라는 옛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문혁 이후의 작품>
전방에 고색창연한 높이 약30m정도의 아름다운 탑이 눈에 뛴다. 좀 마음이 놓인다. 저런 탑이 있을만한 데라면 그리 삭막한 고장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유건을 쓴 선비의 높은 석상이 보인다. 첫눈에 주자의 상임이 분명했다. 또 그 조각 솜씨로 보아 문화혁명 이후의 작품이라는 것도 얼른 알 수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상을 세우는 데도 중국인다운 배려가 있었다. 상 자체의 높이가 9·13m인데 이것은 그의 생일이 음력9월13일 임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란다. 그 상을 받치는 대의 폭이 3·9m인 것은 그가 죽은 날이 3월9일이기 때문이고 그 대의 높이가 5m인 것은 그의 공부가 5살 때에 시작된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두사람이 묵게된 곳은「위제빈관」이라는 숙소. 이 산골에도 있어야할 시설은 다 있다. 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여기 인민정부의 복현장지신림씨 및 그 밖의 몇 사람이 인사를 하고 저녁을 대접하러 왔다. 뜻밖의 일이라 매우 놀랐다. 남조선에서 주자(이 사람들은 주자라 하지 않고 주희라 한다)의 고향을 찾아온 것이 하도 기뻐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내일은 이 부근에 있는 주자의 유적을 복현장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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