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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고종의 홍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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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 모셔졌다. 서울 청량리 홍릉에 있던 명성황후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홍릉갈비로 유명한 청량리 홍릉은 구(舊)홍릉으로, 금곡 홍릉은 신(新)홍릉으로 불린다.

금곡 홍릉은 고종이 승하한 뒤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의 전통 왕릉과 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른 왕릉은 침전(寢殿.왕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고무래(丁)' 모양의 정자각(丁字閣)인 반면 홍릉의 침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一字)'형이다. 또 여타 왕릉에는 문인석.무인석 같은 석상(石像)이 침전 위에 놓여 있으나 홍릉에는 침전 아래 세워졌다. 타계한 왕을 보호하는 동물상도 전통 왕릉에는 양.호랑이.말 3종이 있으나 홍릉에는 기린.코끼리.해태.사자.낙타.말 6종이 배치됐다.

인터넷 네이버에 제공되는 두산대백과사전에는 "이와 같은 새로운 능제(陵制)는 모두 나라가 망한 뒤 이루어진 것이기에 조선 능제의 발전상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

과연 그럴까. 한서대 장경희 교수가 이를 완전히 뒤엎는 논문을 내놓았다. 역사학연구회 '사총'에 실릴 '고종 황제의 금곡 홍릉 연구'에서 장 교수는 홍릉은 이미 1900년에 조성됐고, 능 앞의 문무석은 1899년에, 동물상은 1900년에 제작된 사실을 밝혀냈다. 홍릉은 고종 사망 20년 전에 완성됐다는 주장이다.

논문에 따르면 홍릉은 중국 것을 참고한 황릉이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명성황후가 묻힐 청량리 홍릉을 황릉으로 조성하려 했으나 시간이 촉박해 이를 포기하고, 이후 자신과 왕후(王后)가 묻힐 금곡 홍릉을 생전에 미리 준비했다. 고종은 중국 황릉을 조사하기 위해 베이징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장 교수는 사료를 철저히 조사했다. 구홍릉 조성 과정을 적은 '산릉도감의궤', 구홍릉 석상을 기록한 '석수증수도감의궤', 신홍릉 석상의 형태.규격을 설명한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를 이 잡듯 뒤졌다. 신홍릉의 유물을 실측해 사료와 비교한 결과 모양.크기 모두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심지어 1899, 1900년 당시 능 조성에 참여한 석공의 숫자와 이름까지 찾아냈다. 홍릉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고종 사후 일본인이 급조한 게 아니라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기획했던 '역사(役事)'였던 것이다. 고종은 특히 중국 능을 참고하되 석상의 배치.개수 등을 중국과 차별화해 대한제국 고유의 황릉을 만들어냈다.

한국 근대사의 잘못된 지식을 180도 돌려놓는 멋진 한판승이다. 물론 나라를 앗긴 역사가 바뀌고, 초라했던 대한제국에 휘광(輝光)이 돌지는 않을 터다. 그래도 반갑다. 열강의 눈치만 살폈던 것으로 이해됐던 대한제국의 자주적 의지와 안목을 엿보게 한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잠자고 있는 사료를 되찾고 '구멍 난' 역사를 채운 장 교수의 집념에 박수를 보낸다. 중국과 일본의 협공에 '샌드위치 한국'이 시대의 명제로 떠오른 요즘, 국가의 안위를 고민했던 100년 전 고종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2007년 3.1절이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