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명과 음…미의 절정|에르미타주 서양명화 전을 보고… 임영방<서울대 교수·미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에르미타주 서양명화 전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이번 전시는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소련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어떤 곳인가를 피상적으로 알려줄 뿐 아니라 서구미술에 대한 우리의 눈을 넓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전시 작과 작가들의 대부분이 우리에게는 낯설고, 현대미술이 주는 날카로운 자극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미술세계고, 일찍이 보지 못했던 미적 정서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서구회화세계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이 확립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고 또한 지역적으로 제각기 독특한 미적 정서를 표상하는 작품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 감상자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통념적인 이해로는 르네상스이후에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의 미술로 서양미술사가 이어지고 있으나 이러한 식의 접근보다 전시 작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소재와 표현된 상태, 물감을 다룬 솜씨 등을 살피고 비교하는 것이 시대적 또는 지역적 미관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든 각도에서 볼 때 대단히 소중한 이 전시의 매력은 접근하기 어려웠던 작품을 보여준다는 것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말로만 알고 있던 대가 티치아노·렘브란트·루벤스·반 다이크·푸생·벨라스케스·무릴료 등의 작품을 서울에서 눈앞에 두고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특이한 점은 물감의 명도를 통한 빛과 어두움의 상대적인 변화로 인한 회화적인 효과의 과시다.
이에 따라 그림의 장면은 엄숙한 신비스러움의 분위기로 돼있거나, 극적인 상태를 이루거나, 또는 순간적인 사실성을 노출케 하는 등 현실적이고 생동적인 면면을 산출한다.
이러한 회화적인 사실들이 바로 르네상스이후 서구미술의 특징이다.
어쨌든 이들 대가들의 작품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이 전시의 독특한 가치는 이탈리아 작가 가르디·파니니·스트로치, 네덜란드 작가 반 라이스달·클레즈·메에즈, 플랑드르의 테니에르2세·반 덴 벨데, 프랑스의 그뢰즈·쿠아펠·토네이·들라로슈·디아즈·이자베이 등의 작품이 골고루 소개되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이들의 작품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서구 미술을 형성하는 기둥이며, 또 이들로 인해 서구미술사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풍경화·정물화·풍속화가 도입되고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드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자연·하늘이 그림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풍경화, 사람들의 자연스런 놀이와 생활상, 정물의 촉각적인 사실성, 이 모든 것이 이들로 인해 보여지고 발달한 것이다.

<13일까지 호암갤러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