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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생이 여동생 살인방화 “비극의 환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부모는 새벽2시 나가 밤11시 들어오고…/세남매에 돈주며 “밥 챙겨먹어라”/정 붙일곳 없어 비디오·전자오락에 빠져/학교에 가서도 친구조차 없어/대흥동 살인사건
생업에 바쁜 부모의 무관심과 범람하는 저질 비디오·전자오락 등 유해환경이 국교 4학년인 10세 소년의 끔찍한 살인방화사건을 부른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 대흥동 국교생 살해방화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6일 숨진 미경양(9·국교3)의 오빠 권모군(10)이 이 사건을 범행한 것으로 밝혀내고 범행일체를 자백받았으나 형사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권군을 부모에게 인계했다.
경찰조사결과 권군의 부모는 교외에서 콩나물·두부공장을 하느라 자주 집을 비워왔으며 3남매중 외아들인 권군은 부모의 무관심속에 성적불량으로 특수학급에 편성된채 저질폭력물 비디오·전자오락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권군은 지난달 30일 오후 전자오락실에서 놀다 귀가한뒤 미경양이 『왜 나하고는 놀아주지 않느냐』고 대들어 다투다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자 부엌에 있던 흉기로 배를 찔러 숨지게 했다.
미경양이 쓰러지자 권군은 전기장판줄로 미경양의 목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 씌운뒤 불을 지르고 자신은 빠져나왔다.
권군은 경찰이 출동하자 『집배원 차림의 30대 아저씨가 침입,동생을 목조르고 불을 질러 숨지게 한뒤 달아났다』고 태연히 거짓신고했다.
◇부모의 무관심=권군의 부모는 16년전 결혼,나전칠기제조업에 실패한뒤 7년전부터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에 비닐하우스를 차려놓고 콩나물·두부를 만들어 소매상에 팔아왔다.
이들은 3천5백만원의 전세집에 살며 부모가 매일 새벽 2시에 집을 나서 종일 콩나물등을 시내 소매상에 배달하고 밤11시쯤 귀가하거나 1주일에 2∼3일쯤은 공장에서 지내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
식사등 살림은 권군의 누나(14·중2)가 도맡았고 부모는 집을 나설때 용돈으로 하루 1천∼2천원을 방안에 놓아두는게 고작이었다.
◇비디오·전자오락게임=권군은 동네 네곳의 비디오가게에서 모두 단골손님으로 통했고 사건현장에서도 4편의 중국무술 폭력비디오테이프·전쟁영화물이 발견됐을 정도로 무술·전쟁폭력을 다룬 비디오에 심취해 있었다.
또 파괴본능을 작극하는 전자오락게임도 즐겨 만점을 기록,오락실 주인으로부터 1만원의 상금을 받아 그 돈을 비디오를 빌려보는데 쓸 정도였다.
권군은 범행후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낸 내용이 전날 빌려본 비디오테이프에서 집배원을 가장한 범인의 범행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방화에 사용한 성냥은 장남감 폭약 점화용으로 학교앞 문방구에서 산것이었으며 항상 책가방에 넣고다닌 것으로 밝혀졌다.
◇학교생활=권군은 4학년이지만 한글 교과서를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여서 「특수학급」에 편성돼 있으며 사귀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권군은 경찰에서 비디오·전자오락게임이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진단·대책=아동심리학자들은 어린이들의 심성이 갈수록 퇴폐해지는 이유를 ▲도시화에 따른 구조적 정서 결핍 ▲핵가족화 추세로 인한 가정교육 부실 ▲기성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폭력풍조 ▲폭력을 미화하는 TV·비디오·전자오락 등을 꼽고 있다.
김재은 교수(이대·심리학)는 『10∼12세는 일생중 모방심리가 가장 큰 시기로 부모가 아이들과 잦은 접촉을 못할때 비디오는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며 『권군의 경우처럼 내면적으로 항상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이 제3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특히 맞벌이부부의 자녀들이 탈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방과후 아동들을 위한 사회교육프로그램과 기관설립이 시급하며 동시에 아동들에게의 폭력비디오 대여 등에 대한 강력한 법적 제재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최훈·고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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