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의 샴페인(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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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러해전 한 국문학자가 흥미있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이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고전들이 재해석·재평가돼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인데,가령 허생은 경세가가 아니라 매점매석을 가르친 장본인이며 춘향은 열녀가 아니라 여성의 노예화를 부추긴 인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흥부의 대목이다. 흥부는 착하기는 할망정 게으르기만한 무능력자의 표본이라는 얘기다. 벌어서 자립할 생각은 않고 형에게 기대어 살 생각만 했기 때문에 그의 가난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와 같은 해석이 타당한가의 여부는 학문의 몫으로 돌리더라도,한때 외국언론으로부터 「한국인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것이 아니냐」는 우려반 조롱반의 지적을 받기까지한 한국인의 과소비를 생각해 보면 흥부에 대한 그같은 해석은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샴페인…」의 지적속에는 「벌어들일 생각은 않고 쓸 생각부터 한다」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소비성향이 높아졌다는 지적이라면 혹 몰라도 한국사람 모두가 사치풍조에 물들어 흥청망청 써대고 있다는 지적이라면 당치도 않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벌어들일줄 모르고 쓸줄만 아는 흥부는 존재할 수 없지 않겠는가. 놀부라면 몰라도.
게으르고 무능해 오직 낭비할 줄만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부유층과 불로소득층일뿐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분수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극소수의 부유층과 불로소득층도 사치·과소비풍조를 걱정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경각심에 자극받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온갖 값비싼 외제 수입상품들이 차츰 팔리지 않게 되자 수입업자들이 통관·인수를 포기하는 바람에 엄청난 물량이 세관창고에서 낮잠 자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김포세관의 경우만해도 3개월간의 보세장치기간을 넘긴 물품이 시가 3천억원대를 넘는다고 한다.
이같은 현상이 계속되면 아무도 값비싼 호화 외제상품을 수입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고,외국인들은 더이상 한국인의 사치·과소비풍조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게될 것이다.<정규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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