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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 제대하면 취직 잘된다 젊은이들 몰려 입대 ".좁은문"|승용차에 길비키는 군차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아미산은 해발3천77m의 고지이지만 워낙 아열대지방이라서 그런지 서늘하기는하나 그리 찬 기운은 없다. 정상 부근에는 호텔과 식당이있다. 점심식사를 하고 안내원과 등산도중에서 만난 양화주씨부부는 케이블카로 내려가고 나와 정박사는 올라온길을 걸어 하산했다. 하산길은 더욱 빨라 주차장까지 겨우 한시간이 걸렸다. 중국인들이 도저히 못믿겠다는듯이 놀라서 눈이 둥그래진다. 산길의 곳곳에 아미산의 인삼·당귀·영지를 비롯한 약초를 파는 데가 있었는데 하나도 사지 않은 것이 아쉬워진다.
아미산의 산기슭 부근에서 안내원이 「청향각」이라는 절로 안내한다. 그 곳은 길에서 약1시간정도 깊고 웅장한 계곡으로 들어간 곳인데 당연히 험해야 할 산길이 옛날식으로 매우 잘 포장되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부터 2백여년전 청 강희황제가 여기를 순행했다는 것이다. 황제가 여기까지 왔다니 강희제는 분명히 대단한 황제였다.
청향각으로 가는 도중에 인상깊은 것 두가지. 하나는 일본증 양관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시한수를 지은 것을 일본인들이 「일중시비」라는 아담한 비각속에 시비를 세운것을 보았다.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한 속죄를 이런식으로 하는구나』하고 생각해보니 일본인다운 착상인 것같다.
또 하나는 이글거리는 태양밑에서 많은 인부들이 들 것을 가지고 관광객을 나르는 광경이었다. 인부 두사람이 들것의 앞뒤를 메고 그 사이에 요람처럼 오목한 곳에 사람이 반쯤 누워 타고 있다. 타는사람은 모두 젊은 중국 관광객이다. 아무리 돈을 냈다고는 하지만 이 무더운 날에 들것을 메고 비지땀을 흘리는것을 보고 태연자약하게 그위에 올라앉은 살찐 젊은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다.
아미산 기슭 매우 경치좋은 아담한 작은 호숫가에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이 쓰던 사령부건물이 지금도 잘 보존돼있다. 여기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이 경치속에 곧 국민당의 낙조를 보는것 같았다.
그날 저녁 같이 아미산행을 했던 양화주씨부부가 차대접을 하겠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양씨는 비교적 성공적인 사업가로 그의 집은 민강을 바로 발밑에 내려다 보는 곳에 있다. 좌측으로는 능운각, 운회탑, 높이 71m의 대불, 동파누등을 바라보고 우측으로는 대강에 접한 절벽을 보는 천하에 둘도 없는 절경이다.
양씨 집은 중국기준으로는 부자로서 집안에는 대부분의 가전제품이 구비되어 있다. 부인이 차를 대접하고 집안을 안내한뒤 우리에게 묵화를 하나씩 선물한다. 명화는 못되지만 좋은 그림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런 서비스는 중국에서 흔히 여자가 하는 모양이다. 「남녀수수부친례야」(남녀가 물건을 주고 받으면서 친하지 않은 것이 예의다)라는 맹자 말씀이 생각난다.
호텔에 돌아오니 젊은 아가씨들이 춤을 추자고 손짓한다. 나는 본래 춤엔 자신이 없으므로 정박사한테 모처럼의 초대니 가보라고 했으나 정박사마저 사양한 것은 유감이었다.
그날 밤, 천둥비가 요란하게 내려 우리가 중국에 온후 처음으로 빗소리를 들었다. 악산을 떠나고자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었다. 악산이라는 명소를 이렇게 떠나는것은 아쉬웠으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자동차 편으로 미산으로 향한다. 나는 원래소동파의 고향이 미산이라는 곳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그곳이 바로 여기에서 성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있는 줄은 몰랐다. 더욱이 거기에 동파의 옛집이 있고 동파 3부자를 모신 「삼소사」가 있는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삼소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10시 미산에 도착 즉시 삼소사를 찾았다. 안내판에 의하면 동파의 집은 중소지주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삼소사는 총면적이 5만2천3백평방m나 되는 대저택이며 크고 작은 건물이 20개나 되고 연못·우물·화원등이 구비되어 있다. 내가 아는 동파의 시문에 의하면 동파는 일생동안 가난에 시달린 것이 분명한데 그의 고향집이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것은 웬 일인가. 그 이유는 물론 간단하다. 삼소사는 후세에 세워졌으며 점점 그 시설의 규모가 커지고 아름다운 조경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삼소사안에는 삼소박물관이 있어 동파와 그의 아버지 순, 그의 동생 철의 행적을 그린 그림과 설명이있으며 또 그들과 관련있는 유품등이 보관되어 있다. 후문 가까운 곳에 차실이 있다. 돌 걸상에 앉아 차 한잔을 마셨다. 동파는 40년동안 벼슬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각지를 돌아다녔는데 지금도 그의 유적은 전국에 1백여군데 남아 있다.
미산시내를 돌아본다. 우리나라 시골의 도시와 별 다름이 없다.
지난 몇해동안 이 지방의 곳곳에는 많은 도로가 새로 개설되었다.
지금도 도로공사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미산을 떠나 성도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를 태운자동차가 군대의 수송대 차량1천여대를 추월했다. 길이 비교적 좁은 곳이었는데 우리차가 「빵빵」하고 경적을 울리면서 비키라고 신호하니 군대차들이 다 같이 차례로 길을 비켜주었다. 이 광경을 보고안내자한테 국민이 군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안내원이 하는 말이 젊은이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군대를 제대하면 취직이 잘 되기 때문에 누구나 군대에 가고자하고 있다고 한다. 또 국민사이에는 군대를 경원하는 감정은 없고 국민은 군대에 대해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긴 항일전쟁과 혁명전쟁을 통하여 중공군이 국민사이에 심은 신뢰와 친근감이 아직 살아있다는 징표일는지 모른다.
안내원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북조선 사람들은 아직도 사람의 얼굴이 있는 배지를 달고다니고 있으나 나라가 한 사람의 지배하에 있어서는 나라모양이 도저히 제대로 안된다. 중국도 10년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것이 없어져 매우 기쁘다』고 했다. 그는 성도에 있는 모택동의 큰 석상에 관해 나와 대략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었다.
안내원『모주석이 오른손을 번쩍 쳐들고 있는 것이 무슨뜻인지 아십니까.』
필자『그건 학생들에게 농촌으로 가라는 뜻이 아니었던가요.』
안내원『그렇죠. 그러나 오른 손을 번쩍 치켜든 것은 모주석한테 학생들이 「우린 농촌에 간후 몇해가 있으면 돌아옵니까」하고 물은데 대한 모주석의 대답이랍니다.』
필자『이하, 5년후에 돌아오라는 거였군.』
안내원『그런데 모주석의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어요. 곁으로는 5년이지만 속으로는 5년 이상이었어요. 왼손을 등뒤에 감춰두었으니까요.』
필자『그럼 10년이었나요.』
안내원『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엄지손가락을 펴지 않고 있었으니 주석의 속셈은 9년이었지요.』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었다. 아마 문화대혁명은 실제햇수로는 9년이 걸린 모양이다.
성도에 돌아온 다음날 우리는 옛날의 인공관개로로 유명한 「도강언」과 무협소설로 우리나라 젊은이에게도 잘 알려진 「청성산」을 찾았다. 청성산은 「아미천하수·청성천하유」라는 말로 아미산과 쌍벽을 이루는 이지방의 명산이다. 최고봉은 조공산으로 2천4백34m이며 그밖에도 2천m가 넘는 높은 봉우리가 많다. 시간이 없어 그 중청성 제1봉(1천2백50m)에만 올라가기로 했다.
제1봉 꼭대기가 가까워지면서 성터가 나타난다. 큰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구불구불하게 울창한 숲사이를 누비고 있다. 정자 같은 건물앞에 꼭 무협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복장을 한 도사가 앉아있다. 그 옆을 지나니 새파란 이끼에 덮인 산문안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위에 큰글씨로 쓰인 「상청궁」이라는 정문 현판이 보인다. 글씨가 매우 선명하여 자세히 보니 왼쪽변에 「민국십구년, 장중정」이라는 서명이 보인다.
1930년 장개석이 이곳에 왔을 때 쓴 현판이다. 상청궁이란 중국에서도 유명한 도교의 사원으로 여기에는 홍위병조차도 얼씬 못한 모양이다. 장개석의 휘호로 된 정문이 그대로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청궁안으로 들어가 본다. 향피우는 냄새가 난다. 많은 건물을 지나 본당에 들어간다. 본당에 노자의 조각상이 크게 세워져있고 「노자천하현위령」이라는 가로로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아미산의 불사보다는 엄숙하였으나 천하의 상청궁 본당치고는 오히려 세속적인 분위기다. 도대체 중국의 사원이나 도장에는 그리엄숙한 분위기가 없다. 서안에서 회교 모스크를 하나 보고 나중에 복건생에서 기독교교회를 하나 보았으나 거기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원이니 교회니하는 것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이들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국의 관념인것 같다.
상청궁을 지나 계속 약 10분쯤 올라가니 제1봉 정상이 나온다. 정상에 조촐한 정자가 있고 몇몇 젊은이가 의자위에 앉아있다. 맥주를 사마시면서 주위의 절경을 감상한다.
졸작 칠절 일수
청성산상청궁
상청궁상수림청
별유동천선기생
야보무위현령교
양심수자거허명
(상청궁위에 나무숲이 파란데,
따로 생긴 별천지에 신선기가 서리네.
노자의 무위교(도오)를 따르려거든,
허명을 버리고 수양해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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