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굽어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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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반구정과 앙지대가 쌍둥이처럼 서있는 이 임진강변에 터를 갑아 방초선생 영당·경모재·황희선생동상등이 황희정승의 치적과 덕망을 기리는 유적지로 공원을 이루고있다.
어진 신하가 있어 임금이 어진 것인가, 어진 임금이 있어 어진 신하가 있는 것인가. 우리 겨레를 비로소 겨레답도록 한글을 만들어준 저 세종대왕을 받들어 정승을 지내기를 24년, 영의정만도 19년이었으니 황희라는 이름 밑에 <정승> 두글자가 더붙어야 하나의 이름이 되는 까닭을 헤아릴만하지 않은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공민왕12년(1363년) 황희는 대대로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 판강릉부사를 하는 군서의 아들로 개경(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난다.
어머니 용궁 김씨가 아기를 임신하자 개성 송악산에 있는 큰가뭄에도 마르지않는 용암폭포가 뚝 그쳤다가 열달이 지나서 아기가 탄생하자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고 그의 문집연보에 탄생설화가 나와있다.
우왕 2년, 황희는 나이 14세때 복안궁녹사라는 종9품 벼슬을 조상의 후광으로 받게 되면서 그의 기나긴 관직생활의 첫발을 딛게된다.
21세때 사마시에 급제,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왕조에서 입신양명이 약속되는 터였으나 30세때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고려가 망하자 그는 고려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조선조를 세워 태조가 된 이성계는 황희의 학문과 인품이 그대로 썩이기에는 아까운 재목임을 알고 두문동에서 끌어낸다.
태조원년(1392년) 30세때 세자우정자가 되어 왕실의 스승으로 조선조의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임금을 섬기는 일이 신하로서 욕되는 일임을 모를리 없는 황희였기에 두문동에서 한양으로 오는 길에 어찌 갈등이 없었으랴.
그러나 그는 아직 젊은 나이였고 머리속에 가득채운 지식과 쌓아둔 능력을 새 나라의 건설과 백성들의 삶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더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조에서의 그의 직책은 낮은 것이었고 황희는 한참 뻗어나는 인물이었기에 그를 발탁한 이성계나 현실정치에 참여한 황희나 옳은 판단이었음은 조선조에서의 그의 눈부신 치적이 뒷받침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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