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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내놓고 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태종 재위 18년동안 병조, 예조, 공조, 이조판서등을 두루 역임했는데 태종16년(1416년)에는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양령대군의 세자 폐출을 반대하다가 공조판서로 밀러났고 두해 뒤에는 충령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교하(파주군교하면)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남원으로 다시 옮겨서 귀양살이를 하게된다.
아무리 신임이 두터운 신하라도 왕권을 승계하는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일은 여간한 용기와 소신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 임금이 될 세자를 반대하는 일은 자신의 정치생명뿐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생명까지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희가 목숨을 내놓고 세자책봉을 반대한 충령대군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세종임금이었으니 뒷날 황희를 그토록 중용한 세종은 어떤 임금이었으며 황희 또한 어떤 신하였기에 자신에 반대한 임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세계사를 다 뒤져도 없을 일이거니와 권력이라고 하는 날이 선 이빨을 두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두사람만의 일이었다.
세종4년 60세의 황희는 남원의 유배지에서 풀려나면서 몰수당했던 집과 땅을 돌려 받았고 평민으로 떨어졌던 신분도 복권되어 「경시서제조(경시서제조)」라는 강등된 관직도 받는다. 세종은 초고속으로 황희를 승진시켜 세종8년에는 우의정, 9년에는 좌의정까지 올려놓았으나 다시 서달의 옥사에 연루, 투옥·해임되는등 그의 벼슬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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