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선 절대 물건값을 못 깎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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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물건 값을 깎아본 적이 있습니까?" 협상 강의 중 이런 질문을 하면 손을 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아야 서너 사람.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등 재래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아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어떨까? 그렇다. 손을 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가격표 (price tag). 바로 그것 때문이다. 백화점에서는 대부분 가격표를 붙여 물건을 팔지만, 재래시장에서는 가격표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재래시장에서는 쉽게 가격을 깎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백화점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특정한 정보를 말로 들을 때와 눈으로 보게 (문서로 알게) 될 때 우리가 그 정보의 의미를 달리 인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경우 정보를 말로 들을 때는 그 정보를 변경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눈으로(문서로) 얻을 때는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뇌가 정보를 인식하는 방향이 그런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이 중요한 국면에 접어들었을 경우에는 자신의 제안을 문서로 정리하여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것이 좋다.

문서로 제시할 경우 말로 제시하는 경우에 비하여 상대방은 일종의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된다. 협상의 쟁점 역시 문서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협상이 상당히 경과하게 되면 처음의 쟁점이 흐려지거나 쟁점과 쟁점이 뒤섞여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협상에서 합의된 사항, 아직 합의되지 않은 사항을 정리하여 문서로 정리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제시하면 협상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협상이 최종단계에 접어들 경우에도 문서는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부분의 협상결과는 문서로 정리되고, 그 정리된 문서에 협상의 양당사자가 서명함으로써 협상은 끝나게 된다.

그래서 협상 결과가 문서로 정리되는 과정은 협상의 과정보다 더 중요하다. 말로 합의된 사항이 어떤 단어나 어떤 문장으로 표현되느냐에 따라 협상의 결과가 실질적으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협상가는 협상의 결과를 스스로 작성하려 한다. 상대방에게 맡기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런 관점에서 훌륭한 협상가는 협상과정에서 항상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기록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입장과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자신의 제안에 대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경과를 관찰할 수 있다.

이런 기록이 누적되면 그것을 통해 협상 상대방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또,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려 할 경우 협상가는 기록을 통하여 그런 핑계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

문서와 기록은 협상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정말 협상을 잘하는 사람은 문서가 가지는 장벽 혹은 힘에 굴복하지 않는다. 문서로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는 힘을 뛰어넘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문서로 된 것(price tag)은 바꿀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격표에 가로막혀 점원과 가격협상이 되지 않을 경우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점원은 가격표(price tag)의 벽에 막혀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조정하지 못하지만, 매니저는 점원보다는 큰 재량권을 가진다. 그래서 자신의 여건(물건을 여러 개 산다)을 활용하여 매니저의 재량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가격표에 구애없이 물건 값을 깎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위에서 말한 가격표라는 문서가 가지는 효과 혹은 힘이 없어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문서가 가진 (뇌의 인지)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격표는 흥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모든 것이 협상가능하다 (Everything is negotiable).

하지만, 그렇다고 이 글을 보는 즉시 백화점에 가서 물건 값을 깎자고 하지는 말기 바란다. 경우와 때가 있기 마련이다. (협상컨설턴트)

김기홍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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