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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사회'의 빨간 신호등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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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짐승들에게는 떼(群)는 있어도 가족은 없다. 동시에 새끼를 낳아 기르는 어미는 있어도 인간과 같은 아버지의 존재는 없다. 그래서 "인간의 가족제도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창조한 그 순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남성 우월주위에서 나온 학설이 아니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출산 능력을 지닌 어머니가 자연적 존재라고 한다면 아버지는 법과 제도에 의해서만 그 지위가 확보되는 문화 사회의 허구적 존재다.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남녀 관계에 의해 태어난 아이를 사생아(私生兒)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 논리가 명확해진다. 남성들이 발견하고 개척해 간 것은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출산처럼 생명의 증식과 반복이 아니라 그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문화 문명의 창조였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컷은 아버지가 되고 암컷은 어머니로 업그레이드된다.

해나 아렌트는 희랍인들이 여성과 노예를 차별했던 이유가 성이나 신분보다는 그들의 노동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하는 가사노동은 개인이 먹고살아 가기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치를 두지 않은 것이다. 아골라(광장)같이 공공의 장소에서 공론을 펼치거나 폴리스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행위야말로 노동보다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자의 부(父)자는 도끼를 들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도 하고 또는 손(又)에 회초리 모양을 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것이 도끼든 회초리든 한자에 나타난 아버지 역시 법의 질서나 공공의 규율을 지켜가는 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요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지위의 하락은 단순히 가부장제도의 붕괴나 젠더 혁명의 남녀 문제로 다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아비 없는 홀 애자식"이란 욕 그대로의 상태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의미를 상실한 사생아적 징후군은 공론(公論)의 장을 인터넷의 사사로운 댓글처럼 사적 담론의 공간으로 변화하게 하고 공중전화 같은 공공재는 휴대전화 같은 사유 레벨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른바 명예를 위한 공인들의 봉사 활동마저 사익(私益)을 위한 노동 수단으로 훼손된다.

어느새 '학부형회'가 '자모회'란 말로 바뀌었듯이 교육의 주도권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아가고 아버지 부재의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것은 남성의 위기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보내지는 붕괴의 메시지이며 인간의 퇴행은 동물이 아니라 동물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인류 전체를 향한 경고의 신호인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