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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한국과 일본이 통하고 신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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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의 친구들이여, 좀 더 넓은 시야로 사물을 보자. 한국의 친구들이여,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하자. 중국 친구들이여,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자.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친구들이여, 좀 더 자신감을 갖자. 호주 친구들이여, 좀 더 아시아인처럼 행동해 달라. 인도 친구들이여, 말을 좀 줄여 달라. 그리고 미국 친구들이여, 좀 더 얌전해지길."

나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나라보다 '냉정해져야 할 한국'과 '시야를 넓혀야 할 일본'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당장 오늘 새벽(한국시간) 미 연방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결의안 청문회를 극구 꺼리던 일본의 태도를 보라. 넓은 시야와는 거리가 멀다.

임진왜란 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처음 파견(1607년)된 지 올해로 꼭 400년. 4월 1일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46일간 옛 조선통신사의 발길을 따라 부산~쓰시마~오사카~도쿄 땅을 밟는 '21세기 조선통신사, 서울~도쿄 우정의 걷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진다. 일부 일본인은 조선통신사를 '제 2의 한류'라고 부른다. 첫 한류는 일본 열도에 불교와 선진문화를 전해준 백제인, 제3의 한류는 최근의 한국 대중문화라는 것이다. 기원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야요이 문화를 꽃피웠고, 유전자를 조사해도 일본인이 중국인보다 한국인에 가깝다니 '원조 한류'는 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선통신사는 글자 그대로 양국이 소통(通)하고 신뢰(信)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양국 인사들이 400주년을 기리는 것도 답답한 요즘 한.일 관계를 넘어 화해의 역사, 선조들의 우정,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자는 뜻일 터다.

그러나 양국을 위해서는 '같음' 못지않게 '다름'을 확인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일본과 무슨 경기가 벌어진다고만 하면 그야말로 '냉정'을 잃고 꼭 이겨야 한다고 여긴다. 일본은 '보통 외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인접국→과거의 가해국' 순서로 생각하지 않고 거꾸로 '가해국→인접국→외국'으로 생각하니 스포츠에서조차 머리에서 피부터 끓어오른다.

조선통신사 시절 일본에는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년)라는 1급 외교관이 있었다. 1990년 일본에 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일본 국회 연설에서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언급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저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다름'에 유의해 교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예를 들면 한 일본인이 조선 통역관에게 "조선은 국왕의 정원에 무엇을 심느냐"고 묻는다. 통역관이 "보리를 심는다"고 말하자 일본인은 "형편없는 나라구나"라며 비웃는다. 아메노모리는 "조선 통역관은 국왕 신분이면서도 농사를 잊지 않는 게 군주의 미덕이므로 일본인도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얼마 전 '일본인과 한국인, 아하 그렇구나! 사전'(PHP문고)이라는 일본 문고판을 읽었다. 양국인의 사고방식.습관 차이를 세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이다. 허리로 추는 일본 춤과 어깨로 추는 한국 춤, 남과 거리를 두는 일본인과 대뜸 달라붙는 한국인…. 미처 몰랐던 두 나라의 차이를 깨닫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국인이 일본을 보통 외국으로 여기기 힘든 까닭은 참 많다. 그럴수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일본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고, 결국 한국에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