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9)경성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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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융희황제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노인들을 안에서 보았던지 그제서야 가운데 문이 아닌왼쪽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멍석을 가져다 대문앞에 깔아놓았다.
이때부터 일반인들의 망곡이 시작되었다. 밤에는 대문이 닫혀지고, 담 위로 벚꽃이 만개한 것만 보였다.
그무렵 창경원에서는 밤 벚꽃놀이로 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법석이었는데, 이날자로 창경원을 폐쇄하고 벚꽃놀이도 중지시켰다.
마지막 국상이라고 해서 시골에서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고 길에는 어느틈에 준비했는지 백립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상이 난지 3∼4일 되는 어느날 정오무렵 별안간 금호문앞에 시야단이 났다며 사람들이 뛰어가고 법석이었다.
금호문이란 돈화문 왼쪽에 있는 창덕궁 통용문으로, 국상동안에는 돈화문 정문을 닫고 모든 통행은이 금호문을 이용하였다.
나도 아침일찍 학교에서 돌아봤으므로 금호문·앞으로 가 보았다.
그랬더니 한국청년이 성복제사 때 금호문으로 들어가는 총독을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며 덤버 들었으나 미수에 그치고 일본인 관리와 순사만 죽인채 자신은 현장에서 사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돈화문 일대를 뒤덮자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서 그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나중에 신문을 보았더니 그 청년의 이름은 학선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망곡하러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그전같이 많이 가지 못하였다.
6월 10일이 융희황제의 국장 날이었다. 이날에는 반드시 무슨 소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경찰에서는 천도교를 몹시 경계해서 천도교회관을 몇번이나 수색하고 간부들을 검색하였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국장날 아침에 우리 제1고보 학생들은 아침 일찍 학교에 모여서 돈화문 앞으로 갔다.
우리학교가 제일 먼저 돈화문 앞에 서 있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 5학년은 맨 앞줄에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 바로 앞의 모든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맨 먼저 경성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인 우마노(마야정=라는 일본사람이 우리나라 관복에 말을 타고 돈화문을 나왔고 그뒤로 국장행렬이 잇따라 돈화문을 나왔다.
돈화문을 나온 대여(국상 때 사용하는 큰 상여)가 우리앞에 당도했을때, 우리학교 바로 아래에 도열해서있던 중앙학교 학생들이 별안간「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삐라를 뿌리며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경찰이 몰려와서 이를 제지하였으나 학생들이 여전히 만세를 부르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장례행렬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우리 학생들은 체조선생의 지시에 따라 곧 구보로 학교에 돌아갔다.
이런 소란은 중앙학교를 비롯해 시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곳곳에서 일어났으므로 장례행렬이 엉망이 되어 예정보다 훨씬 늦게 동구능에 도착하었다.
이것이 6·10만세사건인데, 이사건으로 당시 학생이 2백∼3백명이나 검거되었다.
주모자는 중앙학교학생 이선호였으나, 나는 평소부터 그 학생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얼굴이 검고 키가 작은 그는 당시 한창이던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서 여름이면 굵은 삼베로 하복을 만들어 입고 다녔다.
아침에 학교갈 때면 낙원동에서 천도교회관을 지나 계동 중앙학교로가는 큰길에서 그를 가끔 만나곤 했다. 의지가 대단히 굳고 열렬한 애국청년으로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그무렵 서울시내 각 사립학교에서는 총독정치에 반항하는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그런데 공립학교인 제l고보·제2고보는 한번도 시원스럽게 동맹휴학을 한 일이 없었다.
나는 5년동안 학교에 다니면서3학년 때 딱 한번 스트라이크를 했는데 그것도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외에는 모든 학교일에 『네, 네』하고 순종하는 편이어서 서울에 있는 각 사립학교 학생들은 샌님이니 공부벌레니 또는 일본관리나 해 먹으려는 친일파 학생이니 하며 비아냥 거렸다.
이처럼 당시 공립학교 학생들은 하나같이 모두 무기력하였다.
제l고보에 비해 제2고보는 약간우락부락한 편이어시 동팽휴학도 제1고보보다 많이 일으켰고, 학교에서 말썽도 자주 일으킨 편이었다
그러나 제1고보 학생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순하고 학교말 잘듣는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1926년)12월에 일본의 왕도 죽었다..
그는 우리나라 융희황제와 같은 또래의 나이로 인물도 근사한 편이었다.
그때까지 섭정(섭정)을 받고 있던 왕태자 히로히토(유인)가 일왕이 되어 대정에서 소화로 연호를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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