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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6)경성야화<제86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사상단체가 많이 생기고 전조선노동총동맹 같은 노동단체가 생겨난 때문인지 1923년께부터 농촌에는 소작쟁의가 꼬리를 물었고 도시에서는 동맹파업이 자주 일어났다.
이 모두가 그 근본인즉슨 총독정치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지만 총독부 당국을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은 중학교에서의 동맹휴학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동맹휴학의 내용은 대부분 일본인 교사에 대한 배척운동인데 제일고등보통학교도 우리가 3학년때인 1924년 6월에 동맹휴학을 하였다.
물리선생과 일어선생은 실력이 부족해 잘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이것을 감출 생각에서인지 이들 두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자주 썼다.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보다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이들 두 선생을 갈아달라는 진정서를 교장에게 냈다. 교장은 학생들의 진정내용을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주모학생을 처벌하려고 하자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마침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우리들은 학교 북쪽 산 속에 모여 회의를 거듭하였는데 학교당국이 이것을 못하게 하자 한강으로 몰러 나가 백사장에 앉아 회의를 계속하였다.
이 동맹휴학에 앞장 선 것이 4학년이었고, 우리 3학년도 이에 동조해 1주일동안 등교를 거부했는데 학부모들의 설득으로 학생들의 등교가 늘어나면서 동맹휴학은 흐지부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사립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이 잦았지만 공립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한 것은 드문 일이어서 신문에서도 크게 보도했지만 학생들이 패배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학년말에 이르러 문제의 두 선생은 시골학교로 전근되어 더이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동맹휴학을 해본 유일한 경험이었다.
이 동맹휴학이 있었던 이듬해 서울에서 큰 장마가 있었다.
가뭄이 계속돼다가 7월 보름께부터 며칠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않고 억수같이 장대비가 쏟아졌다.
한강 수위가 점점 올라가더니 이촌동과 마포가 침수되고 동대문밖 살곶이다리(한양대 남쪽에 있는 돌다리)가 떠내려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때나 저때나 서울사람들은 구경을 좋아한다. 한길에 말똥이 굴러도 구경꾼들이 모이는 판인지라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도 한강으로 물구경을 나가는 것이 그때 서울 사람들의 기질이었다.
그래서 ,그때 4학년이었던 우리들은 비를 맞으며 전차를 타고 한강으로 물구경을 나갔다.비는 여전히 억수처럼 퍼부었고 거센 탁류는 한강다리에 닿을락말락 하였다. 홍수에 떠내려온 초가지붕 위에는 닭이나 개가 올라 앉아있었다.
그때는 라디오가 없었으므로 신문 호외가 유일한 소식통이었는데 각 신문은 그때 그때 호외를 발행해 홍수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물이 자꾸 불어 철교를 침수시키고 용산 큰길까지 들어오더니 필경 당인리발전소가 물에 잠겨버렸다.
이때문에 서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시가지는 온통 암흑세계로 변해버렸다.
이런 암흑세계 속에서 『조선일보호외』라고 외치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전기가 안들어 오는데 어떻게 호외를 냈을까 하고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조선일보사에서는 정전에 대비해 미리 자가발전시설을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비록 중학생이었지만 조선일보 간부들의 치밀한 준비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시 각 신문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처럼 비상한 사전 대비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생도 경쟁이다. 인생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적어도 이같은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해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지 몇십년 뒤인 근래에 와서 원로 신문기자인 김을한씨와 잡담하던중 우연히 들은 것인데 그때 미리 자가발전기를 준비한 사람은 바로 다름아닌 이상협씨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사에 와 여러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로 지면을 참신하게 꾸며 동아일보를 압도하고 조선일보의 명성을 떨치게 하였던바 이번 호외사건도 바로 그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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