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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태풍에 피해는 A급/「글래디스」 왜 큰 재난 불렀나(해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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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진행 느려 해상습기 대량 흡수/남해서 주춤 강수시간 길어져/동해 고기압에 가로막혀 방향 급선회
23일 오후 우리나라 남해안지방을 강타한 제12호 태풍 글래디스는 태풍관측사상 유례드문 이상진로를 밟아 최고 6백㎜까지 엄청난 양의 비를 영남 해안지방에 집중적으로 쏟아붓는 특이한 행태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이 태풍은 중심기압 9백75∼9백80밀리바의 약한 B급이면서도 예상외로 큰 재난을 몰고왔다.
기상청은 22일 밤까지도 일본 구주 서쪽해상에서 북상하는 이 태풍이 대마도 부근해상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울릉도 남쪽 동해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 근거는 ▲태풍이 북위 30도이상지역에서는 지구 자전에 의한 전향력과 편서풍의 영향으로 거의 예외없이 동쪽으로 휘어지며 ▲동해상공 상층부에는 태풍의 통로격인 기압골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 등이었다.
그러나 이 태풍은 23일 오전 2시 북위 32도,동경 1백28.8도 지점(구주 서쪽 약1백20㎞ 해상)에서 갑자기 방향을 북서쪽으로 틀어 우리나라로 접근했다.
기상청의 한 관계자는 『동해상공 하층부에 미처 예측치 못한 고기압 세력이 확장,바리케이드 역할을 한데다 우리나라 북쪽에도 고기압이 버티고 있어 이 태풍이 갈곳 잃은 미아상태가 되어 멈칫거리다 중국 화북지방의 미세한 기압골 틈바구니를 찾아 북서진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이상진로가 영남 남해안에 많은 비를 몰고온 원인이 됐다.
이 태풍은 발생이후 줄곧 진행속도가 느려(시속 10∼17㎞) 태평양에서 증발한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었던데다 우리나라 부근에서 주춤거리는 바람에 많은 비를 뿌렸다. 게다가 전면에 버티고 있는 고기압 세력은 마치 「젖은 수건을 쥐어짜는」 역할을 함으로써 시간당 20∼30㎜의 장대비를 내리게 한 원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태풍은 물에 상륙한 후에는 급격히 악화되며,중심부보다는 진행방향의 오른쪽 50∼1백㎞에 가장 큰 피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영남 해안지방이 태풍이 직접 통과한 전남지역보다 피해가 컸다.
24일 오전 8시 현재 강우량을 보면 영남해안지방이 ▲울산 5백44.7㎜ ▲부산 5백5.5㎜ ▲거제 5백.2㎜ ▲포항 3백93.6㎜ ▲마산 3백20.3㎜ 등 기록적인 수치다. 지난해 중부지방 대홍수때 세워진 단기간 강우량 최고기록은 5백15.6㎜(수원)였다.
23일 하루 강우량은 부산 4백39㎜(종전 최고 1912년 7월17일 2백50.9㎜),울산 4백17.8㎜(종전최고 69년 9월15일 3백15.8㎜) 등으로 각각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국을 통틀어 하루강우량 사상최고는 81년 9월 2일 태풍 애그니스가 전남 장흥에 쏟아부은 5백47.4㎜다.
이밖에 영동지방에서도 다습한 북동기류의 유입에 따른 지형적 영향으로 ▲대관령 4백38.6㎜ ▲삼척 3백65.5㎜ 등의 폭우가 쏟아졌다.
기상청이 이번 태풍의 진로변경을 그나마 늦지 않게 알아챈 것은 올해초 부산지방에 설치한 기상레이다 덕분.
기상청 관계자들은 이 기상레이다를 통해 태풍의 눈을 추적하다 23일 오전 2시부터 태풍의 눈이 옆으로 퍼지면서 미세하게 서쪽으로 이동되는 것을 보고 『방향을 바꾸는 것 같다』『잠깐 위치를 바꿨을 뿐 결국 동해로 갈 것』이라는 격론끝에 오전 3시쯤 수정예보를 내보낼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기상청은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기상레이다라고는 서울 관악산에 설치한 1대(유효관측거리 4백㎞)밖에 없어 태풍추적에 큰 애를 먹었으나 이후 제주·부산지방에 1대씩 추가설치해 큰 효과를 본 셈이다.
이번 태풍의 진로변경에 대해 기상청은 물론 일본 기상청도 23일 새벽까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으나 괌도에 있는 미 공군 관측소에서는 전날 이미 태풍이 서해로 진로를 바꿀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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