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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니체 지음|「신의 죽음」으로 인간성 회복 설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이하 『차라투스트라』로 표기)는 위버멘슈(Ubermensch : 초인은 잘못된 역어이다)와 영겁회귀를 주제로 하고 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생이다.
생은 약동하는 힘이며, 성장하려는 의지이자, 자연에 대한 긍정이다. 생은 그것의 존재이유를 밖에 두고 있지 않다. 자기목적적이어서 다른 것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이 생의 의미가 플라톤과 기독교의 이원론이 등장한 이후 크게 왜곡되어 왔다. 이들은 세계를 덧없고 불완전한 이편의 세계(현상의 세계 또는 현세)와 영원하며 완전한 저편의 세계(이데아의 세계 또는 내세)로 나누고, 저편의 세계만을 지향해야 할 목표로 제시함으로써 이편에서의 삶을 하찮은 것,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기비하, 자기부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니체는 이들 생에 적대적인 초월적 이상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집약 표현하고 그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한낱 가정에 불과한 저편의 세계에 대한 미망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연적 질서를 긍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 나와서 신이 없는 인간의 미래를 떠맡아야 한다. 이 새로운 인간을 니체는 「위버멘슈」라고 불렀다.
당시 세상에 소개된 다윈의 진화론은 오늘날의 인간수준을 뛰어넘는 탁월한 인간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던 니체를 크게 고무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일차적으로 정신적인 것이긴 했지만 사육과 자연도태를 통한 인간의 진화, 그리고 그 목표로서의 위버멘슈, 이것이 니체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영겁회귀는 어떤 사상인가. 니체는 우주는 닫혀 있는 공간으로서 힘(또는 에네르기)로 가득차 있다는 것, 본성상 정지를 모르는 힘의 영원한 운동에서 무한한 시간의 표상이 생긴다는 것, 또 에네르기는 그 형태를 달리할 뿐 총량에는 증감이 없다는 것 등 당시 유력했던 자연과학의 이론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이론대로라면 무로부터의 생성도, 무로의 소멸도 있을 수가 없다. 있는 것은 기존의 것의 반복적 순환뿐이다. 이것이 영겁회귀의 내용이다.
목표도 없는 영원한 반복, 안식이 없는 끝없는 순환, 이것들은 인간을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위버멘슈만이 이 우주적 질서에 눈을 뜨고 그것에 순응한다.
이 두 가르침 가운데서 후대에 더 큰 관심을 끈 것은 단연 위버멘슈였다. 위버멘슈는 일대 유행어가 되었으며 그 유행의 물결이 전 유럽을 한때 휩쓸었다.
나치가 용의주도하게 이 물결을 탔다. 독일민족 지상주의를 맹신, 세계지배를 꿈꾸고 반게르만적 민족, 예컨대 유대인등의 도태에 광분하던 나치즘 추종자들은 이런 유행을 호기로 니체를 그들의 사상적 지주로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위버멘슈의 환상 속에서 니체를 독일의 국가 철학자로 추앙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니체 사상이 곧 나치즘이라는 통념이 널리 뿌리를 내렸고 니체는 나치즘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하여 열광 속에서 예찬되기도 하고 분노 속에서 매도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사주된 촌극이었다. 니체는 평소 독일문화의 후진성울 꼬집고 반유대주의를 냉소했는가 하면 민족간의 피의 유대에 인류의 미래를 꿈꾸기도 한 반폭력적 세계시민주의자가 아니었던가.
니체 사상이 「엄숙한 철학」으로서 수용되어 철학사적 영향의 자취를 남긴 것은 현대 생철학과 실존철학에서다. 신의 죽음과 인간의 해방, 생의 의미와 인간의 본래성 회복, 이에 힘입은 종래가치의 전도, 그리고 허무주의 등에서 생철학자들과 실존철학자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니체 철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차라투스트라』는 아직도 살아 있는 책이다.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의 하나이면서도 좀처럼 이해되고 있지 못한 것이 이 책이기도 하다. 서두에 소개한 독자에 대한 니체의 오만한 비웃음이 허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간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것인가. 거기에는 첩경이 없다. 우선 그 동안의 악의에 찬 세평과 오도된 열광에서 벗어나 니체 사상 전체의 틀을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니체를 이해하면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만 이해해서는 니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보임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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