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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71황제의 천여년 도읍지 장안엔|대안탑 홀로서 옛 영화 말하는 듯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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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유리잔에 가득히/호박 빛 액체를 따르라./ 진주 같이 붉은 것 술통에서 철철 넘치고/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면 기름이 우는데/병풍치고 장막 드리우니 우리들 마실 자리./ 용 울음처럼 피리 불고/악어 가죽 북을 치라/계집은 흰 이빨 드러내어 노래하고/가는 허리 하는 하늘 춤을 추라.』
전한이래 1천1백년간 71황제의 도읍지였던 장안. 만당의 시인 이하가 노래했던 최상급 술과 안주, 그리고 온갖 보석들과 교태스런 여인 등 고대 세계제일의 도시 장안은 간곳 없고 지금은 전자·항공 등 첨단산업도시의 서안이 됐다.
지진을 일으키는 못된 용을 짓누르려 시내 대로에 종루를 세울 정도로 지진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중국역대왕조들이 들어서면 전왕조의 궁궐을 불질러버렸기 때문일까. 천하의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실크로드터미널로서의 장안의 옛 영화는 서안시내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백이나 두포, 그리고 백거역·한유 등 당대 일급 시인들이 노래하던 장안의 영화와 미인들, 그리고 충절의 그림자에 기대를 걸고 이곳에 왔던 문인들은 일부 첨단도시로 변했으면서도 자유시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행상들과 걸인들의 모습에 실망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단지 종루에서 바라보면 64m 높이의 대안탑만이 홀로 솟아 장안의 영화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황제들의 궁궐은 모조리 잿더미가 됐지만 1천3백년이 지나도 이 탑만이 우뚝 남은 것은 불심 때문일까.
이 탑은 현장법사가 2만5천㎞를 답파, 16년만에 인도에서 불전을 구해와 번역한 것을 안치하기 위해 자은사안에 세운 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탑을 쌓던 승려들이 하도 굶주려 이를 안 큰기러기 한마리가 물로 떨어져 스스로 구워졌으나 승려들이 거기서 대각, 기러기를 묻어줬다는데서 대안탑으로 불린다 한다.
그러나 도심지에서 빠져 나와 60∼70㎞ 달려 진시황병마용과 화청지를 찾은 문인들은 이내 고대 제일의 도시의 규모와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시내에서 60㎞쯤 달리다보면 옥수수·밀밭 등의 평원지대에 돌연 야트막하고 펑퍼짐한 야산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산이 아니라 바로 진시황능이다. 그곳에서 2㎞쯤 더 가면 거대한 체육관 같은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6천여 진시황 근위병모습을 간직한 진시황병마용갱이다. 길이 2백10m, 너비 60m, 깊이 47m50㎝에 10개의 갱이 줄지어 있으며 거기에 6천여개에 달하는 실물크기의 병사와 말, 그리고 전차들이 줄지어 있다. 물론 사후 진시황 지하궁전을 지키는 근위군단이다. 진시황은 실제로 이만한 숫자의 자신의 근위병단을 순장하려 했으나 그러면 민심이 흉흉, 왕조가 끊길까봐 실물크기의 토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피니 병마 하나하나가 각기 나름의 근엄한 표정을 지니고 있어 그야말로 황제앞에서 사열받고 있는 살아있는 군단 그대로였다. 병마갱의 규모가 이만하니 최초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의 산더미 같은 능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지 짐작할 수도 없으나 중국당국에서는 발굴을 미루고 야산같이 방치해두고 있었다.
진시황능에서 다시 10㎞쯤 달려 화청지에 이른 문인들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화청지는 현종과 양분비가 노닐던 온천리궁. 젊어 치세를 잘해 성당시대를 이룩한 현종은 말년 아들의 후궁인 양귀비를 앗아 이곳에 숨겨두고 즐긴다.
『구름 보면/열두폭 치마인양하고/꽃 보면 얼굴인 듯/더 못 견딜 이 그리움./ 군옥산에나 가야 만날까./ 달밤에 요모를/찾아야 할까.』
혼자 보기 아까웠던지 현종은 이백을 불러 온천물로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를 보여주고 시를 짓게 한다. 이백은 위와 같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선녀로 양귀비를 노래하고 현종앞에서 이 시에 반한 양귀비가 따라주는 술에 만취했다. 시선 이백에게도 꿈같은 봄밤이었으리라. 그러나 천하의 황제에게도 질투가 있는 것인가. 이 일을 계기로 이백은 장안에서 추방돼야 했다. 그뿐인가. 이백이 노래한 「경국의 미색」으로 하여 양자이자 정부인 안녹산의 난으로 양귀비는 현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성당시대도 점차 기울기 시작했으니.
다시 서안시내로 들어온 문인들은 종누 바로 아래 자리잡은 섬서생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을 도읍지로 삼았던 역대 왕조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이 박물관에서 눈길을 끈 것은 비림이었다. 중국의 경전들과 역사·서체·화법 등이 음각돼 총1천87기의 비석으로 늘어선 이 비림은 곧바로 동양문화의 텍스트 그것이었다. 특히 총 7실로 나뉜 비림 1실에는 『주역』『시경』 『논어』등 경전 12부가 1백14개의 비 양면에 총65만자로 새겨져 가위 세계에서 가장 큰 교과서 구실을 하고 있었다. 한자권 변방민족들이 경전 자구에 문제가 있으면 여기 와서 이 원본과 대조해 보라는 듯 늘어선 비 사이에서 중화민족의 긍지를 보는 듯 했다.
최근 장편 『전국시대』를 펴냈던 작가 조성기씨도 이 비림에 와서는 그저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품을 집필하면서 사서삼경 등 중국의 모든 경전을 독파했는데 이 경전들이 거대한 돌로 늘어선 것을 보니 자신의 지식은 한낮 돌멩이에 불과하다며 그 규모와 오만하게까지 여겨지는 중화민족의 자긍심에 위축감이 든다고 한다.
그들의 「오만한」 중화사상은 대체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모태를 보기위해 다음날 새벽 황하상류의 고원도시 난주로 날아갔다. 나무 한그루 없는 듯한 건조한 민둥산들로 둘러싸인 난주 시내 한가운데로 폭 1백m 남짓의 누런 황하가 흐르고 있었다. 난주시는 그 황하 물을 산꼭대기까지 펌프로 올려 시내의 산을 가꾸고 생활용수로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황하에 다리를 놓아 교통을 소통시키고 있었다. 이 다리가 황하에서는 가장 상류에 위치한 철교다. 황하는그 첫번째 도시 난주를 키우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면서 넓어지며 중국 대륙을 키우고 나아가 동양문화를 잉태했을 것이다.
황하의 첫번째 도시 난주시는 황하의 이러한 역할을 상징이라도 하 듯 철교 옆에 「모친상」이라는 현대적 조각작품을 세워놓았다. 무릎 위에 아이를 안고 반쯤 누운 여인의 부드러운 눈길과 표정, 그 작품을 빙빙 맴돌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작가 윤흥길씨는 빙그레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 왜 웃느냐는 물음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나도 왜 웃는지 잘 모르겠다』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염없이 모친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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