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시비|제자논문 자기것인양 발표…「짜깁기」도 한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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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학예술은 곧 창작의 산물이다. 따라서 창작의 반대말인 표절은 문화예술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비문화·반예술의 개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문학예술계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표절시비가 일지 않는 곳이 없다. 문화예술의 후진성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치욕적인 실상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고질병으로 먼저 얘기되어야 하는 것이 학술연구분야의 표절시비다. 연구논문 표절시비는 우리사회에서 존경받는 집단중 하나인 교수사회에서의 양심부재현상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배가된다.
사회문제화 됐던 대표적 사례는 82년 명문사학의 J교수가 다른 대학교수의 논문을 목차·내용·자구까지 그대로 베껴 학회지에 발표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당시 J교수는 『고의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학교를 떠났다. 문제의 논문을 실었던 학회지의 책임자들도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인 지난 5월에도 박사과정의 소장연구자가 H대 L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 자신의 석사학위논문 등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주장의 글을 역사전문잡지에 기고해 표절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본지에 보도되면서 두 당사자간 논쟁으로 비화했으나 문제를 제기했던 소장학자의 공개토론제의를 L교수가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사실상회피하는 바람에 시비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남의 논문을 그대로 복제하는 사례는 흔히 외국논문과 관련돼 나타난다. 외국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번역해 자신의 논문인양 발표하거나 국내 논문을 거꾸로 번역해 외국에 발표하는 경우다. 유학에서 돌아와 현지에서 가져온 희귀저작을 거의 그대로 베껴 책으로 내면서 자신의 저작인양 위장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논문을 도용하는 사례는 흔히 사제간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제자가 연구한 결과를 스승이 자기이름으로 발표하거나 공동연구로 발표하는 일이 많다.
도제식 사제관계가 엄격한 학계에서 이를 공개 비판했다간 약자일 수밖에 없는 제자는 학위취득은 고사하고 강사자리 하나 얻기도 힘들어진다. 일부에서는 오히려 제자가 스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발적으로 논문을 갖다바친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표절시비가 표면화되는 사건은 미술계에서 많다. 권위있는 공모전에는 으fp 표절스캔들이 따른다. 바로 지난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화부문 대상 수상작이 뒤늦게 스페인의 세계적 추상화가인 타피에스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장 수상결정이 취소되고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중이던 작품이 내려졌다. 사전에 이를 가려내지 못한 심사위원들까지 비난받은 것은 물론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전신인 81년 국전때는 더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 아마추어 대학생의 작품을 베껴 작가가 어엿하게 건축부문대상을 받은 것이다. 정말이지 이만저만한 먹칠이 아니었다.
당시 심사위원 한사람은 대상을 최소하면서 『정교한 모방보다 서투른 창작이 더 중요하다』는 말로 창작의 절대성울 강조해 한때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미술계의 표절시비는 회화나 건축에만 그치지 않고 서예나 공예 등에서도 문체가 된다.
국내 문화예술부문 중 가장 선진임을 자부하는 문단에서도 표절시비는 이어진다.
법정으로까지 번졌던 가장 대표적 사례는 인기작가 K씨의 작가지망생 P씨 작품 표절사건이다. K씨는 85년10월 P씨의 고소로 서울지검동부지청에 의해 저작권법위반 혐의로 입건되었다. K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11명의 이름이 P씨 작품과 같고 내용은 물론 문장도 2백여 군데나 같다는 혐의였다. K씨는 『P씨의 습작은 읽어봤으나 다른 각도에서 창작했다』고 변명했다. 이 사건은 결국 K씨의 사과와 6백만원의 위자료지급으로 끝났다.
문단의 가장 흔한 표절사례는 등용문인 신춘문예에서 볼 수 있다. 기성작가와 달리 별다른 명예훼손의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는 작가지망생 일부가 『일단 붙고보자』는 맹목적 단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남의 작품을(심지어 유명작가의 작품까지도)슬쩍 도용해 응모하는 경우다.
다른 출판사에서 머리들 짜 좋은 기획을 하고 책이 잘 팔리면 금방 그 기획을 쫓아간다. 이 또한 표절이 아닐 수 없다.
창작은 모방의 산물이란 얘기도 있다. 물론 습작과점에서 모방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방의 연장이 창작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엄연한 양심의 단절이 있다.
표절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인간 개인의 도덕과 양심이 맑고 순수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의 대안은 작품을 대하는 관람객이나 책·논문등의 독자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비평과 공개적 토론의 활성화일 것이다. 문화예술계의 표절시비가 어차피 칼로 물베듯 판명되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한 많은 정보가 일반에 공개돼 보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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