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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 國弓界의 '사부님' 김경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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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량(閑良)하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좋아하는 '반 건달'을 일컫는 말로 알지만 원래는 활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양궁이 아니라 전통의 국궁이다. 옛적부터 '일궁(一弓), 이첩(二妾)'이랄 정도로 워낙 쏠쏠한 게 활쏘기 재미. 그러다 보니 틈만 나면 활터로 달려가거나, 아예 일거리를 제쳐두고 빠져들기 십상이었을 터인즉 전혀 틀린 말도 아니리라.

실제로 한량들은 철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조명시설이 갖춰진 요즘엔 야사(夜射)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래도 활쏘기엔 풍세(風勢)가 온화하고 하늘이 쨍한 봄, 가을이 제격이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요즘도 심심찮게 각종 대회가 열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지난 23일 서울 관악산 기슭에 있는 관악정에서 열린 서울시내 한량들의 입단 및 2단 승진대회. 한 초로의 신사가 참가자들에게 활을 점검해주고 자세 시범을 보이며 지도하느라 여념이 없다. 형형한 눈빛에 완력이 느껴지는 손과 팔, 꼿꼿한 허리가 얼핏 보아도 장골이다. 일주 전 남산 팔각정에서 열린 서울시장기대회에도 모습을 보였던 그는 바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7호 장안편사대중회 기능보유자이자 사직동 황학정(黃鶴亭)의 사범인 김경원(金慶源.60)씨.

올해로 활을 잡은 지 40년째인 그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들이 대회마다 불려다니며 활 쏘랴, 지도하랴 '한량'치곤 오지게 바쁜 몸이다. 그래서인지 "평생 활이나 쏜 게 뭐 자랑이냐"며 한사코 취재를 사양하던 그가 세 차례 방문에서야 어렵사리 입을 뗀다. 그런데 활을 왜 쏘냐니까 "좋으니까 쏘지", 그렇게 좋으냐니까 "쏴보면 알아"식이다. 하는 수 없이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겨 홍탁을 놓고 마주앉으니 그제야 문기(文氣) 섞인 강의가 좔좔좔 쏟아져 나온다.

"한량치고 골골이 없고, 한량치고 악인이 없어요. 그만큼 건강을 챙기는 데 좋은 운동이자 자기수양의 방편이란 얘기죠. 공기 맑고 풍광 좋은 곳에서 몇푼 안들이고도 전신의 근육을 단련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거기다 정신일도(精神一到)가 아니면 과녁 근처에도 못가요. 그런데도 할 일 없는 늙은이들의 여기(餘技)쯤으로나 여기고 있으니…." 전통 활쏘기에 대해 무심한 세태가 자못 안타까운 눈치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양궁, 그거 우리가 들여다 보급시킨 거요. 지금은 청출어람격이 됐지만 그 솜씨가 어디서 나왔겠소."

숱한 외침 속에서도 온전할 수 있었던 게 다 우리의 활 덕분이고, 그러니 나라님들도 몸소 활쏘기를 하며 장려했던 문화적 풍토가 이뤄낸 쾌거라는 얘기다. 이어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인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왜 활쏘기가 포함됐는지, 경국대전.대전회통 등에 실린 시사(試射)내용, 활쏘기와 관련된 일화 및 속담까지 줄줄이 쏟아놓는다. 활쏘기와 관련해선 가위 무불통지다. "그저 주워들은 풍월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그의 이름 석자가 전국 3만여 궁도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까닭을 알 것 같다.

그가 활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스무살 때인 1963년 초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과 경기북부 지방에선 한량들의 소속단체인 정(亭)끼리 겨루는 편사가 성행했는데 특히 그의 고향인 고양은 파주와 더불어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의 집안 역시 증조부 때부터 활쏘기 내력이 있는 데다 사계(射契)에 들어야 장가를 들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라 집 근처 송호정(松虎亭)을 찾아 자연스레 활을 잡았다. 하지만 농사일(논 40마지기, 밭 3천여평)에 치이다보니 또래들보다 시작이 이태가량 늦는 바람에 따라잡기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활쏘기에 드는 경비 마련을 위해 아예 좋은 논을 골라 다섯마지기를 '활 논'으로 정한 다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20순(巡:한 순에 살 다섯대)을 쏘고 농사일을 마친 뒤 저녁에도 15순을 쏴댔다. 당시 백일 만에 '몰기(沒技:한 순을 모두 명중시키는 것)'를 하면 화살 10개(쌀 한 가마반)를 상으로 주곤 했는데 그는 93일 만에 첫 몰기를 기록, 주위를 놀랬다. 하지만 일취월장, 10개월이 지나 한창 물이 오를 무렵 그는 홀연 경주로 몸을 감췄다. 활의 원리와 성질을 모르고는 명궁이 될 수 없으리란 판단에 각궁장(角弓匠)을 찾아 배우기 위해서였다. 꼬박 1년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까지 활 다루기에 한번도 실수를 않는 건 죄다 이때의 경험 덕분이에요. 실력도 부쩍 늘어 한 때 17번이나 연달아 몰기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제나 이제나 활을 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한량은 매우 드문 편.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는 입사 10여년 만에 전국에 호가 나 곳곳으로부터 사범으로 불림을 받았다. 75년 공주 관풍정을 시작으로 울산 만하정(79년), 서울 황학정(82년), 경기도 사범(86년), 원주 학봉정(88년), 성남 한성정(90년) 등등. 하지만 92년 돌연 활터에서 모습을 감췄다. 사범을 그만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올바른 궁도 보급과 후진양성을 위해 사범을 해왔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뒤치다꺼리 하다 내 활인생이 녹스는 것 같습디다. 그래서 2년쯤 숨어 지내다 이것저것 털어버리고 활만 쏘아볼 양으로 94년 황학정에 사원자격으로 입회했는데 어디 내버려둬야죠."

그가 95년부터 다시 황학정 사범 노릇을 하게 된 사연이다. 때문에 지금도 그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각종 민원이 쇄도한다. 줌이 가느니 한겹 더 싸주오, 오늬가 깨졌으니 갈아주오, 살에 줄이 갔으니 잡아주오, 갑자기 세졌으니 삼삼이를 눌러주오… 등등. 궁도인이 아니면 알아듣지도 못할 내용들이지만 모두 활쏘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다지 그만두려 했던 일이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일일이 받아준다.

현재 그의 공인 실력은 4단. 대한궁도협회의 규정상 5단 이상이라야 '명궁'칭호가 부여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성격상 겉치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단수도 84년 전국체전에 서울시 대표로 출전(초단 이상이라야 가능)키 위해 마지못해 딴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활도 가장 센 막막강궁(莫莫强弓)급이다. 더구나 지난달 10회째 행사를 가진 장안편사(長安便射:서울 도성 안팎의 射亭들끼리 편을 갈라 겨루는 활쏘기 대회)의 복원에도 크게 기여(2000년 5월 기능보유자 지정)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나대는 법이 없다. 성실겸손을 강조하는 궁도의 계훈(戒訓)이 몸에 익었기 때문이다. 95년부터 황학정의 궁도교실을 이끌며 3년 전부터 육군사관학교의 사범까지 맡고 있어 바쁘기 그지없는 가운데에도 그는 요즘 몇몇 궁도지인들과 함께 세계민속궁대회의 서울 개최와 활 관련 체험을 종합적으로 할 수 있는 레저타운의 건설 추진에 힘을 쏟고 있다. 우리 활의 우수성을 알리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다.

"궁도의 잠언 가운데 '쏘아 맞지 않으면 돌이켜 반성하라(發而不中 反求諸己)'는 말이 있어요.

세상살이에 두루 통하는 얘기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술자리가 파하면서 인터뷰도 끝났다. 하지만 그와의 대작을 통해 어렴풋하나마 '활쏘기=관덕(觀德)'의 등식을 이해하게 됐고, 내친김에 2차로 옮겨 끝내 대취하고 말았다.

글=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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