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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과잉 민족주의는 독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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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에는 민족주의로 먹고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음악 프로듀서 박진영씨의 지적에 논란이 뜨겁다. 한국 사회의 과잉 민족주의 때문에 한류(韓流)가 '한국 만세'로 변질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해외에서 반(反)한류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으며 우리 사회 일각의 '좁고 넘치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수차례의 외침(外侵)과 식민지화, 분단, 전쟁 등을 겪으며 견고한 방어 기제로 작동.발전해 왔다. 열강에 휘둘려온 불운한 근현대사는 방어적 민족주의를 더욱 배타적인 성벽으로 공고화했다. '우리'가 아닌 '남'은 가차없이 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폐쇄적인 성 안에서 우리 얼굴만 거울처럼 보고 살았다. '욘사마'에 열광하는 일본 여성팬들 앞에서 공연히 우쭐하면서 일본 영화나 소설이 국내에 들어올라치면 금세 '왜색문화 범람'의 경보가 울렸다.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면 좋아라 하면서도 가수 비가 중국 공연에서 중국 옷을 입었다고 시비를 건다. 요즘 TV 연속극에서 부는 고구려 열풍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방어적 민족주의는 곧잘 이기적 민족주의로 변신하곤 한다. 재일교포의 차별대우에 흥분하면서 국내에서 벌어지는 제3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는 눈을 감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폐쇄 민족주의로는 살아갈 수 없다. 지구촌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닫힌 민족주의는 설 땅이 없다. 물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벗어던지자는 게 아니다. 넘치는 민족주의를 덜어내자는 얘기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다 보면 다원성을 해치게 된다. 민족이라는 허울 아래 시민적 자유가 침해되는 사례를 또 얼마나 봐왔는가. 삼전도비를 훼손한다 해서 병자호란의 치욕이 씻겨지는 게 아니다. 그 같은 이데올로기화한 민족 개념을 떨쳐 버리고 세계 시민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다. 그것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 민족이 번영할 수 있는 생존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