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에 훨씬 앞서 중국 정원 문화의 대표가 된 곳이 있다. 한(漢) 문제(文帝)의 아들 양효왕(梁孝王)이 지은 양원(梁園)이다. 현재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에 있다. 이 정원의 특징은 예원이나 졸정원과 마찬가지로 초호화판이었다는 점에 있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져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역시 각양각색의 누각이 즐비했고 호수와 기암괴석, 화려한 나무가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경치가 매우 빼어났고 조용해 달콤한 휴식이 가능했던 이 양원은 한대 문사들이 꼭 한 번 묵고 싶어 하는 동경의 장소였다. 양효왕은 실제 수많은 당대 명사를 초청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모자랄 게 없었던 한 왕실의 왕자 양효왕은 문사들을 넉넉하게 대접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이후 줄곧 이어졌던 식객(食客)의 바람 덕에 많은 문사는 이 양원의 신세를 톡톡히 진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효왕이 한 왕실의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일이 발생한다. 황제의 노여움을 산 그는 결국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만다.
염량세태의 한 장면이 여기서 벌어진다. 그 많던 문사의 발길이 끊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 양원의 일화를 전하면서 당시 문사들이 "양원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오래 머물 곳이 아니더라(梁園雖好 終非久戀之家)"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사마천이 전한 이 말은 요즘 중국에선 '안일한 환경에 푹 빠지면 게을러진다'는 뜻의 경구로 쓰인다. 쓰임새는 그럴지 몰라도 권력의 부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문사들의 경박하고 비속한 저울질이 더 눈에 띈다.
배반과 이탈. 권력의 세계에서 늘 등장하는 행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결국은 집단으로 탈당을 하고 말았다. 명분과 실제라는 두 가지 면에서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침몰하는 당에서 발 빼자는 셈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텐데 말이다. 여권 대통합을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단순 철새 정도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한 기만이다. 더 큰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