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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과학교육 입시에 밀려「반쪽」만 공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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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시내 K고교 여름보충수업 화학시간.
교사가『집기병 속에 물에 적신 빨간 꽃잎을 넣고 기체를 채웠더니 탈색현상이 일어났다. 그 기체는 무엇인가』라며 보기를 들자 학생들이『염소』라고 대답한다.
물론 학생들은 이 간단한 실험을 해본 일이 없다.
다만 염소가 물과 화합하면 산화작용을 하는 산소이온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외워 알고 있을 뿐이다.
전체 학교의 70%가 실험실이 없고 실험기구 확보율은 15%에 불과, 학생들은 과학을 실험이 아닌 칠판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입시에 밀려 허울만 남은 고교과학교육 현장의 실태를 알아본다.
◇실태=서울K고교3학년 박모군(18)은 올 들어 물리와 지학과목을 단 한시간도 배운 일이 없다.
공과대학을 지원할 예정인 박군은 대입학력고사에서 화학과 생물을 선택하기로 한 때문이다.
물론 박군의 1학기 수업시간표에는 물리·화학·지학·생물등 과학 4과목이 버젓이 들어있고 성적표에도 물리·지학의 점수가 매우 높게 기재돼 있다.
그러나 이 시간표는 교육청의 불시점검에 대비한「외부용」이고 실제 시간표에는 물리·지학 시간이 없다.
성적표의 물리·지학점수는 각각 화학과 생물과목 점수를 준용한 것이다.
즉 화학과목이 88점이면 물리과목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당연히 88점이 되는 식이다.
생물담당 김모교사(46)는『이과학생의 경우 대입학력고사에서 4개의 과목중 2개 과목을, 문과학생은 1개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치르기 때문』이라고 이같은 현상을 설명했다.
학생들이 시간투자에 비해 비교적 고득점이 용이한 화학·생물등 과목을 선택하고 학교측도「효율적인 입시지도」를 위해 이를 수용, 아예 여타 과학과목은 시간표에서 빼버렸다는 것이다.
김교사는『특히 이과반 학생의 경우 모든 과학의 기초가 되는 물리교육은 필수적』이라며 『그러나 입시위주의 파행적 과학교육으로 물리학과를 지망한 학생이 물리를 배우지 않는 기현상이 오히려 당연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국 28만4천7백서명의 인문계 고교생중 83·5%가 생물을 선택하고 있으며 기초과학인 화학은 2%(5천8백11명), 물리는 고작 1·1%(3천2백43명)만이 선택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물리와 화학중 한 과목을 필수로 택해야 하는 자연계 학생도 마찬가지여서 23만2천9백11명의 조사대상 학생중 화학十생물이 42·7%나 됐으며 물리十생물은 10·3%,물리十화학은 5·8%에 그쳤다.
결국 현행 입시위주 교육은 절름발이 과학교육을 조장하고있으며 이에 따라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도 떨어져 최근 국제 과학학력도달평가에서 우리나라 고교생이 최하위권에 머무르는 심각한 사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속에「실험실을 통한 생생한 과학교육」은 이미 공염불이 됐다.
과학기술처의 최근 설문조사결과 중·고교생의 93%가『과학시간에 실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호기심을 나타낸 반면 고교생의 93%가 실험실습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P고교 물리담당 이모교사(38)도『교사1명에 60명의 학생이 실험하는 것도 어렵지만 12개반 7백20여명의 학생이 필수실험 요목대로 14회 실습을 한다면 1만여개의 리포트를 교사1명이 검토·평가해야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교사는 현재의 절름발이 과학교육이『입시위주 과학교육, 실험실 및 실습기자재 부족등이 어우러져 빚어낸 총체척 결과』라고 말했다.
◇개선대책=한국교원대 허명교수는『과학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무리하게 분과적으로 시행되는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대기오염의 경우 지구과학에서는 목사평형·온실효과·기상의 변화등이, 화학에서는 대기의 구성·연소와 산화·오존의 형성 및 파괴등이, 생물에서는 생태계·건강과 위생등이, 물리에서는 빛의 성질·밀도·열과 에너지·중력등이 각각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행 과학교육은 이들을 각각의 별개과목으로 지도하고 있어 비효율적이란 지적이다. 특히 이같은 분과교육은 현행 대입제도하에서 인문계는 1과목, 자연계는 2과목만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배우기 때문에 자연히 파행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과학교육과정 개편과 입시에서의 실질반영이 관건이란지적이다.
서울P고교 이교사는『3백20점의 전체학력고사 배점중 인문계는 20점(6%), 자연계는(40)점 (13%)에 불과, 현행 제도하에서 고교생들에게 과학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허교수는『초·중·고교의 과학교육은 과학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력을 키우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통합교육과 함께 실생활위주의 과학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과학교육이 초·중·고교를, 통해 연계성이 없고 책에서 제시한 실험내용도 부적절,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교원대 김범기 교수는「소리」의 경우 국교2학년 과정에서 한번 배우면 고교졸업때까지 학습할 기회가 없어 소리의 반사·흡수등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국교의 교과과정중 실험내용에서 ▲책에서 제시한 프 리즘이용 빛의 분산실험의 경우교실에서는 실제와 다르고 ▲열전도현상을 촛농이 녹는 것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식초속에서의 금속반응은 너무 느려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불신마저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에따라 92년에 개편되는 교육과정에서 과학교육만큼은 ▲초·중·고교연계 ▲실생활 위주 교육 ▲주기적 교과서 개편 ▲교과의 목표와 학습내용의 유기적 결합이 중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예=영국의 경우 88년「교육개혁법」을 제정, 국교의 핵심교과로 모국어·수학에 과학을 첨가했다.
특히 모국어와 수학은 주당수업시간이 국교때 8시간에서 중학교 4∼6시간, 고교 4∼5시간으로 줄어드는 반면 과학은 국교 5시간에서 중·고교때는 8시간씩으로 늘고 있다.
교육내용도 철저히 실험위주로 계획·가설·예상→조사·고안→결과 및 발견의 해석→추리→발표의 순서를 밟는다.
예를 들어 고교의「풍차의 제작 및 탐구」에서는 직접 만들어보는 과정을 통해「과학이란무엇인가」를 체험토록 함과 동시에 수학·모국어·기술을 자연히 체득할 수 있도록 하고있다.
곧 과학교과가 분과교육이 아닌 통합교육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교육은 우리나라처럼「칠판을 통한 암기」가 있을 수 없고 철저히「실험을 통한 이해」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박종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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