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루기·사랑의 세계 "가득"|영화 『꿈의 구장』을 보고…김민숙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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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에는 빛 바랜 흑백 사진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부드럽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 사진들을 설명해준다.
야구 선수였으나 일찌감치 좌절하고 야구팬으로 눌러앉은 아버지, 일찍 어머니를 여윈 뒤 자장가 대신 야구와 야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어린 시절, 꿈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짓눌려 사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 일부러 집에서 가장 먼 버클리 대학을 선택하게끔 했던 아버지와의 불화, 영어를 전공했지만 당시에 유행 (?)했던 반전 데모와 마리화나에 빠졌던 60년대의 대학 시절. 그곳에서 애니를 만나 결혼하여 딸 카렌을 얻고 처가가 있는 아이오와에서 전공이나 취미와는 상관도 없이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부가 되어 정착한 「나」.
아내와 딸을 가진 평범한 서른 여섯살의 가장 레이 킨셀라는 어느날 해질 무렵 자신의 옥수수 밭에서 일하다가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올 것이다.』
그 목소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거듭되고, 마침내 그는 그 목소리를 따라 기상천외한 모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옥수수 밭을 뭉개 야구장을 만들고, 계속되는 목소리를 따라 길을 떠나고…. 덕분에 그들의 농장은 파산하여 남의 손에 넘어갈 지경이 된다. 레이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
어떤 때는 무슨 추리 영화처럼, 때로는 유령 이야기처럼 그의 여행은 계속된다. 내용을 그냥 옮겨 적으면 너무나 황당무계해서 아무도 믿지 않을 그런 여행이다. 그러나 그 황당함을 믿게 할뿐 아니라 가슴 뜨거운 감동까지 전해주는 힘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다. 아니 감동 정도가 아니라 관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야구에 대한 꿈을 버리고 부두 노동자로 주저앉은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가혹한 비난을 하고 가출한 뒤 돌아가실 때까지 만나지 않아 용서를 구하지 못해 가슴 아파 치는 아들, 꿈을 이루고자 몸부림치는 남편을 이해하고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는 아내…. 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모든 인간의 관계는 꿈과 사랑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자신의 나이보다도 젊은 모습인 부모의 옛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이대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진정한 꿈을 찾아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라며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깨어나 뒤척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잊지 못할 영화」의 목록 속에 소중히 넣어두게 될 것이다.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꿈 같은 현실」이라고 해야 될지 분간할 수 없도록 관객을 매혹하는 공로는 아무래도 이 영화를 만든 필 앨든 로빈슨 감독에게 돌려야할 것 같다. W P 킨세라의 첫 장편소설 『맨발의 조』를 읽고 너무나 감동하여 6년에 걸쳐 스스로 각본을 써서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다는 그의 열정은 어쩌면 영화 속의 레이와 닮은 듯하다.
꿈을 믿고 사랑하면 그것은 언젠가 이루어진다. 꿈이 이루어지는 곳, 그곳이 천국이다. 열정이 무언가 잘못되게 하더라도 그래도 열정이였던게 낫다. 서른 여섯, 꿈을 이루는 마지막 찬스일지도 모른다…. 이런 잠언 같은 대사들을 뒤로하고 영화관 문을 나서며 나는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내용의 목소리를 듣게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서른 여섯은 이미 지났지만 나도 새로이 무엇인가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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