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박원순 시대를 논하다] 下. 개혁에 공짜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투명성과 나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신영복 교수(右)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이 시대의 사표로 새롭게 조명하고 싶은 인물을 묻자 申교수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을, 朴변호사는 독일의 법철학자 루돌프 예링을 꼽았다. [박종근 기자]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는 대학생 시절감방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훗날 변호사로 들어가니 크레졸 냄새가 나더라고 했다. 새우젓 독 용변에 비해 크레졸 소독은 대단한 진보였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일제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리 행형 제도가 다소나마 개선된 것은 민주화 인사들이 교도소에 드나들면서부터라고 했다. 지식인이 투쟁과 감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또 있었다. 두 사람은 검찰 수사, 내년 총선, 시민운동, 나눔의 장래에 상당한 기대를 표했다.

사회:정치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요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신영복:단적으로 얘기하면 개혁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모순이에요. 당장 내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법 개정을 비롯해 각종 입법 조치가 필요한데, 거기 막대한 이해가 걸린 의원들이 법을 만드는 현실이 답답할 뿐입니다.

박원순:헌법 제1조에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주권자로서의 책임이 오늘만큼 절실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 개혁 요구가 대선 자금 수사 때문에 높아졌지만 이 열기가 식으면 금세 또 없었던 일이 될지 모릅니다.

사회:대통령 측근의 비리는 어떻습니까.

朴:말 그대로 절망이지만 이런 것마저 다 조사하는 상황이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이 큰 결심을 해야겠지요.

申:도덕적 신뢰를 통해 정치적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개혁의 핵심이에요. 드러난 것은 과감히 처리하고, 잘못한 것은 즉시 사과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회:내년 총선에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朴:상당히 기대할 만합니다. 열린우리당은 새 비전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려고 하고, 그에 맞서 한나라당도 과거와 같은 인물로는 이기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역 대결 구도가 완전히 깨지진 않겠지만 예전처럼 유권자를 의식하지 않는 공천으로 표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申:개혁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는 모순의 해결은 새로운 정치 세력이 정계에 들어오는 제도 개혁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선거 제도를 고치면 어떨까 합니다. 새 인물의 당선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1인2표제 같은 것 말이죠.

사회:지난 총선처럼 낙천.낙선 운동을 다시 하실 생각입니까.

朴:필요하다고 보지만 저는 빠지고 싶습니다. 시민운동 쪽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재벌과 재계에 무엇부터 고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까.

申:자본의 논리를 수정하라는 요구는 애초에 무리입니다.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상호 불신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朴: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투명성이 확보되면 문제의 90%가 해결된다고 봅니다. 기업의 지배 구조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만 투명하면 경영의 책임과 성과가 분명해집니다.

사회:개혁이 효율적이려면 그 수단은 어떠해야 합니까.

申:정부가 주체가 되고 선두에 나서는 개혁은 살아 있는 개혁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개혁이 암초에 걸린 듯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태에서는 시민운동이나 각종 부문 운동에서 개혁적 요구가 광범위하게 일어나야 하고, 그것이 제도 정치권에 전달돼 입법으로 마무리돼야 합니다.

朴:개혁의 자기 발전이 중요한데, 이는 유권자.납세자.소비자 등 국민 각계각층에 임파워먼트(empowerment), 즉 참여의 권한과 기회를 부여할 때 가능합니다. 일례로 밑빠진 독처럼 새나가는 예산의 낭비를 보지요. 납세자 소송법은 정부가 낭비한 것을 소송을 통해 환수하는 법이지요. 모든 국민이 감사관이 되는 이 법이 만들어지면 감사원 1백개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회 통과가 계속 미뤄지고 있습니다.

사회:현재 검찰의 개혁 강공 드라이브를 어떻게 보십니까.

朴:검찰이 대단한 사명감으로 임하니 측근 비리 특검 말고는 그대로 검찰에 맡겨둬도 좋을 듯합니다. 개혁과 관련해서 누가 법무장관이 되고 누가 검찰총장이 되느냐는 문제보다, 누가 그 자리에 와도 제대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현재의 우리 시민운동에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申:감시나 고발 같은 소극적 비판의 지평을 넘어 사회의 억압 구조나 체제의 문제점도 같이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각종 이데올로기 샤워에 세뇌되지 않는 의식의 산실이 되고,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우회하지 않는 운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시내를 따라가면 결국 바다를 만나듯 시민운동도 정직한 방향으로 끝까지 파고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제 의식과 실천 현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朴:1980년대의 학생운동 세대들이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 활동가들의 저수지랄까 예비군으로 역할을 해줬거든요. 그런데 간사 모집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요. 월급 몇십만원 받으며 온몸을 던져 일할 사람이 요즘 몇이나 되겠습니까.

사회:시민운동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나 탈선 같은 것은 없습니까.

朴:탈선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유혹이야 많죠. 우선 운동을 그만두고 싶은 유혹도 있고, 도그마에 빠질 위험도 있죠. 분노로 격앙되면 평형 감각을 잊기도 합니다.

사회:외부에서의 유혹이나 회유는 어떻습니까.

朴:그런 것도 있습니다. 금전 스캔들이라든가 분명히 있는데 시민운동이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멋대로 굴러가지는 않지요. 시민운동에는 진입 장벽이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어와서 경쟁할 수 있습니다.

사회:朴변호사께서는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하셨는데 나눔의 아름다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朴:참여연대를 그만두고 나와서 똑같은 일을 하기도 뭣하고 해서 따로 시작했는데요.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과거의 성장 지상주의.천민 자본주의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야기됐습니다. 그래서 소유와 독점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성숙한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3년 전에 비해 지금은 굉장한 속도로 의식이 바뀌고 있어요. 저희 '아름다운 재단'이 아무 힘도 없는데 지난해 26억원을 모금하고, 올해에 이미 1백억원을 넘어섰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30억원이나 되는 부동산을 다 내겠다고 공증한 분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주축은 역시 개미 군단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申:돈을 나누는 것을 넘어 사회의 인간 관계를 진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아주 훌륭한 사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나누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자본이기를 포기한 가치, 자본과 관계없는 김밥 할머니의 저축 같은 것들이 나눔을 실천하는 재료입니다. 개인의 자선은 한층 넓고 높은 분배 문제로 발전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한층 더 성숙하기 위해서라도 이 나눔의 문제를 제도 내에 도입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회:申선생님의 '더불어 숲 학교'는 어떤 목적으로 시작하셨습니까.

申:인간 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질서가 사회성입니다. 그 사회성이 심각하게 저해되는 상황에서 뭔가 아름다운 이야기의 산실을 꾸며보자고 했습니다. 이런 뜻으로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모여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의견을 나누는 조그마한 모임을 '더불어 숲 학교'라고 이름붙인 것입니다.

사회:우리 교육은 이것이 문제니, 이것만은 시급히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하나만 짚어주십시오.

朴:교육부 장관만은 정말 제대로 된 인물을 골라서 대통령 임기끝 아니면 다음 대통령 때까지라도 일을 계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申:무엇보다 대학입시 제도를 바꿔야 해요. 입학 장벽을 졸업 장벽으로 바꿔 병목 지점을 졸업으로 옮기면 어떨까요.

사회:이 시대의 사표로 조명하고 싶은 인물 하나만 소개해 주십시오.

申:많은 사람이 사표로 드는 사람 중에 다산과 연암이 있는데, 저는 연암으로 기웁니다. 다산이 복고적이고 농본적이라면 연암은 진취적이고 민중적입니다. 인권이나 민중의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연암이 시대의 문제를 조망하는 하나의 뷰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특히 연암의 어떤 면이 주목할 만합니까.

申:같은 실학자 중에도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 쪽은 복고적.농본적 질서로 되돌아가려는 데 비해 연암은 새로 일어나는 근대 지향적인 문물에 눈을 돌렸습니다. 당시 청나라를 배우자는 것은 냉전 시대에 중국을 배우자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발상이지만, 그런 실용적이고 이용 후생적인 관점이 오히려 돋보입니다.

朴:글쎄요. 제가 고시 공부하기 전에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한 사람이 루돌프 예링이라는 독일의 법철학자예요. 그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보다 선진적인 시스템을 갖춘 나라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집요한 투쟁이 그만큼 컸었습니다. 그것은 선진 사회로 가려는 우리의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