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갉아먹는 「몬도가네 보신」|이정배 <감신대 교수·조직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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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오래 전부터 오래 살려는 욕망을 갖고 살아왔다. 신화 형식으로 표현된 성서의 창조기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유혹과 연루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보게 된다.
본래적으로 장수하는 삶이란 인간에게 있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곧잘 「지금 여기」 고정불변으로 안주하려는 동물적 본능과 다름없게 변질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머무르려는 욕망이란 한 처음 (창조)과 한끝 (종말) 사이에서 「되어감」을 본질로 하는 인간 존재로부터의 이탈이며, 성서적으로는 이를 죄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점차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보다는 「얼마나 오래 살수 있을까」하는 양적인 차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의료 혜택을 많이 받고 사는 사람일수록 영원히 머무르려는 욕망에 집착해 돈으로 생명을 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한몸의 건강을 위해 우리에게 들리는 백의 달콤한 유혹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즉 알려진 바대로 살아 있는 사슴의 피, 곰의 발바닥과 쓸개즙, 녹용, 뱀의 생식기, 그리고 그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짐승들의 생명 그 자체를 요구하는 인간 자신의 피폐해진 정신 상태를 「피」라는 시각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간디는 먹는 음식물에 따라 인간의 성격과 본성이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육식보다 채식을 선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평화 우호적인 본능이 쉽게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의 산 생명을 돈으로 사서 먹고 마시는 소시민적 이기주의는 처음부터 이 사회의 불행을 예고해 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본래 불살생계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대표적 계율이다. 그러나 이는 지금 인간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먹거리로 내놓은 모든 동·식물들, 그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는 인간 삶을 요구하는 폭으로 해석되어가고 있다.
이점에선 성서도 마찬가지다. 노아의 홍수 이후 신은 이 세계 존속의 조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 것과 짐승들은 피 (생명)째로 먹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지켜지고 있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게 된다. 동물들을 피째로 즐기려는 인간들 속에서 사랑의 관계는 기대될 수 없다.
그러기에 신약 성서는 다시금 신앙인들에게 말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하느님의 아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노벨상 수상자 카네티가 했던 『아마도 대심판의 날에 인간을 심판하는 동물이 있을 것이다』란 말을 기억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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