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집…번영하는 회사|기업들 「가정의 날」정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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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빠, 일찍 돌아오세요! 그리고 함께 놀아주세요.』 유치원생 그림일기의 한 토막 같지만 사실은 최근 대농그룹이 경영혁신을 위해 사무실마다 붙여놓은 포스터 내용이다.
『남편을 설득해 부부·고부간의 갈등을 함께 해결합시다.』
이것도 역시 흔한 여성잡지의 표제가 아니다.
기아자동차의 사외보 「함께 가는 길」이 최근호에 다룬 주제 중 하나다.
이처럼 최근들어 「가정에 눈을 돌리는」기업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직장과 가정의 위상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급격히 변해가면서 이제 「가정을 의식하지 않는 경영」의 한계를 깨닫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영혁신의 초점을 「조기 귀가」에 맞추거나 아예 「가정의 날」을 지정, 이날만큼은 일찍 퇴근하도록 하는 기업도 있고 가정과 직장의 대화를 주선하는 기업도 많다.
이 같은 변화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부분은 사보. 기아의 「함께 가는 길」앞에는 아예 「행복한 가정, 번영하는 회사」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어 책자를 더 낸 목적이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게 돼있다.
실제로 50페이지가 넘는 분량 가운데 회사관련기사는 불과 세장을 넘지 않고 나머지는 부인·아이들이 직접 만든 글, 그림, 그리고 함께 찍은 가족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금성사는 그 동안 사보에 실렸던 임직원 부인들의 글을 모아 「금성의 아내」라는 비매품 단행본을 최근 펴냈다.
금성사 측은 『사보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내용이 가족들이 직접 쓴 글들이어서 아예 단행본으로 묶었는데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요즘에는 사보를 사원들에게 직접 나눠주는 대신 가정으로 부치는 회사들도 늘고있다.
남편의 일을 가족들이 사보를 읽으며 함께 이해해 달라는 뜻이다.
기업의 이같은 변화는 조직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어가고 있는데 따른 필연적인 적응 과정이다.
대기업 인사관리담당자들은 『이제 가정도 경영의 주요한 고려대상이 됐다』며 「가정과 회사 일은 더 이상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을 균형 되게 꾸려갈 수 있도록 회사에서 배려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입을 모은다.
상공회의소는 최근 직장인 4백명을 대상으로 직업의식을 조사했는데 응답자중 65·9%가 수입이나 승진에 관계없이 잔업은 싫고 가족들과 함께 개인적인 여유시간을 갖고싶다고 말했다.
또 일시적이고 불가피한 시간외 근무는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회사일 때문에 가정생활을 희생할 수 없다는 대답이 70%에 달했다.
효성그룹이 최근 실시한 사내의식조사에서도 과장이상의 중간관리자는 60%가 일이 생기면 회사 일이 먼저라는 반응을 보인데 비해 그 이하의 직급에서는 80%가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구성원들의 직업관·가정관이 이미 상당히 변했고 갈수록 이런 가정 우선주의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리라는 증거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생산성과 경영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기업 스스로 지금까지의 의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 셈이다.
사보 외에도 회사와 가정을 연결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 코오롱그룹은 l박2일로 사원부인을 초청, 부인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최고경영자도 직접 나와 함께 토론을 벌인다.
또 짝수 목요일은 「가정의 날」이다. 이날이면 아침부터 부서장의 책상에는 「오늘은 가정의 날, 부장님부터 먼저 퇴근하세요」라는 쪽지가 어김없이 놓여진다.
평소보다 1시간 이른 오후6시면 눈치볼 것도 없이 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일손을 놓고 퇴근을 한다.
이날은 회식을 않도록 해 되도록 술자리도 줄인다. 이 제도는 삼성·럭키금성상사 등 상당수 기업체에서도 시행돼 이제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있다.
회사측은 모두 『일찍 퇴근해 피로를 덜 수 있어 다음날업무에 능률이 오르는 것으로 분석됐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외에도 망년회나 야유회가 부부동반·가족동반으로 치러지는 경향이 짙어졌고 최근에는 회사측이 주선하는 장기근속자에 대한 부모효도관광, 부부동반 해외여행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생일이면 회사에서 카드와 축하 케익을 집으로 배달해주는 경우도 많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원들을 위해 합동결혼식을 열어주는 회사도 늘고 있다.
하지만 회사들의 이 같은 변화들이 그보다 더 빨리 변해가는 사원들의 의식과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근무경력 3년인 대기업사원 윤모씨(30)는 『과도한 업무를 그대로 둔 채 각종 제도만 나와봤자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지적하고 『우선 연월 차나 정기휴가기간부터 마음놓고 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회사도 일벌레보다 직장과 가정을 균형 되게 꾸려갈 줄 아는 사원을 원한다』는 기아자동차 인사담당 노민홍 이사의 말처럼 가정에 대한 기업의 의식변화는 최근 기업문학의 변화 가운데가장 뚜렷한 변화의 하나로 꼽힌다.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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