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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의전수석-"대통령 그림자"…측근중의 측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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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역대 청와대 의전수석들의 경력, 대통령과의 인연 등을 보면 이들의 청와대 내 위상과 기능 등은 보다 명확해진다. 「초대」의전수석이랄 수 있는 조상호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재건 최고회의의장 시절부터 통역관 겸 의전비서관으로 관계를 맺었었다.
5·16쿠데타 후 군복을 입은 채 내각사무처장비서관이 된 그는 68년12월31일 박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처음 생겨난 의전담당비서관(1급)이 됐다. 69년8월까지 1급 비서관으로 있다가 9월부터 74년 주 이 대사로 임명될 때까지 차관급 의전수석으로 일했는데 대통령의전비서관이 된 것도 운명적이다.

<6개 국어 구사>
당초 박대통령 의전비서관에는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 통역관으로서 박·맥그루더 회담통역을 맡은 한상국씨가 내정됐으나 임명절차를 밟는 도중 약간 문제가 있어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 비서관으로 있던 서씨가 발탁됐다는 것.
육군중령으로 군복을 벗은 서비서관은 이후 빈틈없는 일 처리와 영·불·독·이·일어 및 스페인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실력을 인정받아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는다.
조 비서관은 69년 10월까지 비서실장으로 박 정권 초반을 주름잡던 이후락씨 아래에서는 순수한 실무형으로서 일했다.
그후 실무형의 김정병 실장이 부임한 이후에는 약간 영역을 넓혔다는 후문이다.
일부에선 조수석이 대통령면담일정 조정 등에 개입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 자신은 청와대 일에 대해선 일체 함구하고 있다.
그는 이런 신중함 덕분에 최장수 의전수석이라는 기록을 세운 후 국회의원(유정회)·이탈리아대사 등을 지내고 대한체육회장에까지 발탁된다.
조수석 후임인 최광수 수석은 탁월한 영어실력, 외무고시 수석합격(56년) 과 외무부 아주국장 등 엘리트 외무관리로서의 실력이 평가돼 최연소 국방차관(38세)에서 의전수석으로 발탁됐다.
정통 외무관료로서 한미안보문제처리에 능력을 발휘했던 그는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기용됐던 자타공인의 실력파.
여기에 8·15 저격사건으로 부인 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 대통령의 친근한 말벗이 돼 준 것도 신임을 더하게 했으며 6척 거구답지 않게 온화하고 원만한 품성이 김정염 실장 등과 잘 조화됐다는 것.
그는 박대통령이 인사와 관련, 『아무개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떠냐, 능력은 있느냐』 는 등의 질문을 할 때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으며 월권을 극도로 꺼렸으며 다만 외교·안보정책분야에는 직접 개입,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최수석은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시· 박 동항사건,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대비책수립 등에 관여했는데 특히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청와대 내에 특별팀을 설치, 진두 지휘한바 있다.
당시 최수석은 유병현 합참본부장과 김정태 의무부정무차관보 등을 지휘, 3주만에 카터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했고 박-카터 단독 회담 때는 미국인 통역을 제치고 단독통역을 하기도 했다.

<월권 극도로 자제>
박대통령은 최 수석에게 퇴임후의 회고록 집필 등을 위한 자료정리를 은밀하게 지시할 만큼 최 수석을 신뢰했다.
박대통령이 사거한 후 최 수석은 국장등 사후처리를 도맡아했고 다음 최규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다.
최대통령의 의전수석은 정동렬씨.
정 수석은 최대통령이 말레이시아 대사시절(64∼71년) 태권도 교관으로 나와 있다가. 눈에 들어 현지 채용된 후 최대통령이 외무장관·대통령외교안보특보·국무총리를 거칠 때 비서관·보좌관으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파벌을 만들지 않은 최 대통령의 유일한 계보인 셈. 정 수석은 평소에도 과묵, 대인관계가 덤덤한 최 대통령 주변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였다.
그러나 상황에 떼밀려 권좌에 오른 최대통령이었던 만큼 당시 한참 기세 등등한 군 수뇌부에 대한 대책마련에 고심했다고 한다.
정 수석은 군장성들이 청와대 본관에 들어 올 때 권총 휴대금지는 물론 엄격하게 예를 갖추게 했고 대통령주재 회의 때는 주영복 국방장관·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어느 누구든 15분전에 미리와 대기토록 했었다.
최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양위」를 할 때 배려를 당부했던 게 정 수석과. 서기원 공보수석이었을 만큼 늘 최대통령사람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김병훈 수석은 전형적인 실무형.
전대통령을 국보위상임위원장 때부터 비서실장으로 보좌한 김 수석은 전대통령 재임 7년 반과 임기를 같이했다.
그는 전대통령이 퇴임 후 맡기로 했던 원로회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됐으나 원로회의 자체가 없어져 일자리 없는 신세가 됐다.
대통령의 통역으로서 의전업무 이외에는 거의 간여치 않은 탓에 그의 재임 중 김경원· 이범석· 함병춘·강경식·이규호·박영수·김윤환 등 비서실장만 7명이나 바뀌었어도 별 마찰이 없었다.
전 대통령 임기중 의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인데 집권초기· 외국대사의 신임장 제정 때 모닝코트대신 한복 두루마기를 입게 하는 방법 등도 구체적으로 검토됐었다.
이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대사가 부경(?)스럽게 한 손으로 신임장을 내밀고 다리를 꼬고 앉는 일은 없어졌는데 두번씩이나 시정 경고를 받은 외무부 의전장이 이행을 못해 직위해제 된 일도 있었다.
아무튼 영어에 관한 한 최광수 수석과 쌍벽이던 마이클 김(세례명)은 영어실력으로 국회 외무전문위원이 돼 차지철 외무· 내무위원장의 신임을 받은 게 인연이 돼 차 경호실장보좌관 (1급)으로 청와대에 발을 들여놓았었고 전대통령과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됐는데 국회근무 경력으로 정치분야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음에도 언급자체를 피했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의전수석의 임무가 통역관이냐는 비판도 받았다.
김 수석은 6공 출범초기 노 대통령으로부터 함께 일할 것을 권유받자『공화국이 바뀌는 마당에 수석이 그대로 있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고사.
그는 전대통령이 백담사에 유폐되는 등 고초를 겪자 의리 없는 사람들이라며 6공 요직에 있는 자신의 처남과도 상종조차 않았다.
김 수석은 전대통령이 하산하자 금년 초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났다.
노 대통령의 전반기 의전수석이었던 노창희씨는 노 대통령이 정무장관시절 유럽·아프리카 15개국을 순방할 때 외무부 조약국장으로 수행한 인연에다 이른바 TK 후배로서 6공과 인연을 맺었다.
정통 외무관료 출신답게 철저히 자신을 지키며 실무형 의전수석으로 지내왔으며 본업인 외교관련 이외의 업무분야에는 일체관여를 피했다.

<정치실세로 평판>
그는 휘하의 일반 의전비서관들과의 회식도 않을 정도로 주어진 업무에만 매달렸다. 그는 외교관으로 복귀하고 싶었기 때문인데 주영대사로 발탁돼 소원을 풀었다.
이병기 수석은 이와는 반대로 정치실세로도 소문나 있다.
노 대통령이 개각 등 주요 결정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깊은 신임과 애정을 갖고있다는 것이며「노 대통령과 마지막을 함께 할 유일한 측근」으로서 퇴임 후의 문제까지 협의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수석이 노 대통령의 절대적 신뢰를 받은 것은 노태우 정무장관 비서관으로 인연을 맺은 이래 10여년 간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대권고지에 이르게 한 1등 공신이기 때문이라는 것.
사리판단과 정치감각이 뛰어난 직간을 마다 않는 용기와 소신을 갖췄다는 게 그에 대한 대체적 평판이지만 절대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노 대통령을 돋보이게 하려는 숨은 노력이 남다르다.
작년 말 노 대통령이 의전수석으로 승격시키면서 차관급으로 올리려했지만 외무고시 동기생들을 비롯한 주변과의 균형을 고려, 끝까지 1급 수석으로 남겠다고 고사하는 등 신중한 처신으로 주변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고있다.
이 수석은 외무부시절 노신영 장관의 사람이었다.
노 대통령이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된 후 노 외무가 쓸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한 것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권력의 한 가운데서 대통령 모시기가 특히 어려운 우리 풍토에서 대통령의 의중을 살펴 국정운영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윤활유 구실을 하는 의전수석자리는 권부의 속성만큼이나 까다롭고 미묘하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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