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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채광석의 문학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오오 버림받은/온갖 어둠에 숨은 소리/그 찢어지는 가난을 위로하지 못하는 삶들이/감옥에 갇히는 나라/꿈에라도 가야지/흐르는 세월 튀튀한 검은 얼굴 속에서/번뜩이는 사람됨을 일켜세우고/인생은 다투고 다시 다투는 것/사랑일수만 있다면/힘일 수만 었다면/아아 역사의 밑바닥에 깔린/부르짖음 속살 터지는 아픔일 수 있다면.
경기도 팔당공원묘지에 있는 채광석씨(1948∼1987)묘비에 새겨진 시 『꿈1』의 일부다. 12일 그의 4주기를 맞아 문인 및 문화운동가 50여명은 오는 일요일 깊숙한 산마루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찾아 땀을 뻘뻘 흘리며, 혹은 소나기를 뒤집어쓰며 산에 오를 것이다. 『웬 묘소는 이리 깊숙이 써 죽어서까지 생사람 고생시키냐』고 투덜거리면서.
위 시같이 채씨는 갇힌 몸 꿈에서라도 역사의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에 온몸을 바치다 간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자 문화운동가였다.
80년대 어둠의 긴 터널을 제 한몸으로 통과할 수 없어 비판적 지식인·문화인들을 끌어모아 문화로써 한 시대의 어둠을 밝힌 인물이었기에 이러저러한 민주화운동현장에 「차출」당했던 선·후배들은 묘소에 오르며 『죽어서까지 생사람 잡는다』고 문화운동가로서의 채씨의 투철성을 회고할 것이다.
그리고 운동권으로서는 답답하고도 우울한 요즘 그의 진한 독설·욕설이나 한번 실컷 들어보면 속이 확 풀릴 것 같은 심정으로 고인과 대화를 나눌 것이다.
삶의 한복판에서 어쩔수 없이 터저나오는 부르짖음이 채씨의 문학관이었다.
채씨는 생전 노래부르기를 끔찍하게 좋아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 80년대 중반 주요재야문학운동단체 실무자로서 문인·문학인들의 「술상무」 역할을 해야했던 채씨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술이 오르면 노래를 불러댔다. 유행가가 아니라 자작곡·작사로 무언가 끊임없이 불렀다. 자신의 학생운동으로 인한 투옥으로 직장을 잃은 부친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아부지 아부지 우리 아부지」를 후렴처럼 둘러대던 그의 노래들은 며칠후면 시로 다듬어져 발표되곤 했다.
자연스레 터져나온 현장의 시관을 가진 채씨는 그것으로 시, 나아가 문학의 테두리를 넓혀나갔다. 노동현장에서 터져나온 이른바 「노동문학」을 당당히 기성문학과 견주게 만든 평론가가 채씨다.
80년대 노동문학의 최대 수학이랄 수 있는 박노해씨를 발굴한 채씨는 84년 나온 박씨의 시집 『노동의 새벽』 해설에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인데서 오는 구체적 현장성이 모든 시들의 피와 살을 형성하고 그 시들을 살아서 펄떡거리게 한다』며 시의 현장성을 중시했다.
그러나 채씨는 『실천적 운동성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거기에다 구체적 현장성을 성급하고 도식적으로 짜맞춤으로써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념적 과격성으로 흐른 감이 있다』며 박씨의 일부 도식적·과격적인 시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대중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런 시들은 『근로대중의 가슴에 스며들어 감동을 낳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는 채씨의 지적은 박씨의 후기시는 물론 좀더 급진적으로 흘러 앙상한 구호 같은 요즘의 일부 민중시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로 지속적 효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채씨가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공주교도소 복역시절부터다. 채씨는 옥중시절 뒤에 아내가 된 애인 강정숙씨에께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보냈다. 민중·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애틋한 사랑을 낭만적으로 읊기도 한 그 편지 대부분은 그대로 시가 되어 총2백30여편으로 그의 시전집으로 출간됐다.
한편 채씨는 치열한 평론활동을 통해서도 80년대 민주문학진영을 주도해 나갔다. 후배들이 시나 소설을 좀 봐달라고 가져오면 『썩어빠진 놈, 이것도 작품이라고』하며 빡빡 찢어버리거나 새빨갛게 고쳐 아예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선배들과 술좌석을 같이하면 『형님, 전번에 발표한 그 시, 그것도 시라고 썼소. 좀 잘 쓰시오』라며 항상 싸움반 논쟁반을 불렀던 채씨의 평론활동은 기성문단에는 그만큼 도전적인 것이었다.
특히 80년대 후반 들어 문단을 들끓게 했던 「민족문학주체논쟁 도 바로 채씨의 문학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시민적 민족문학에서 민중적 민족문학으로」라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 제목이 말해주듯 그는 60년대이래 현실참여 문학에 「소시민」이란 딱지를 붙여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평론의 출발점을 삼았다.
80년대들어 정치·사회적 왜곡과 외세에 의한 분단상황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도 민중문제와 분단을 다룬 작품들이 감상이나 관념, 구호의 차원을 벗이나지 못한 것은 전문문인들의 계급적 한계, 즉 소시민성에 있다고 본 채씨는 80년대 중반노동자·농민 등 기층민중의 사회적 대두에 주목, 이제 그들이 줌심이 된 「민중적 민족문학」을 제창하고 나섰다.
88년 월·납북문인해금과 출판자율화조치에 따라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문학이 유입되면서 채씨의 민중문학론은 그의 사후 여러 분파현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현장성」과 「전통적 민중정서」를 강조했던 그의 문학론은 우리의 역사·현실에서 자생적인 것이었다. 민중문학론 중 가장 급진적인 노동해방문학 같이 당파성을 내세워 문학의 폭을 스스로 좁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채씨는 『문학인이면 모두가 동료』라며 노동자 당파성에 입각, 전문문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기성문단에 노동문학을 입성시켜 문학의 폭을 넓혀나갔다.
『그동안 학교에서 쫓겨나기를 네 번, 복학하기를 세 번 거듭해온 지난날이 스멀스덜 차례로 다가선다…. 그런데 다시 대학4년생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40줄을 코앞에 둔 나이, 직장에서는 과장님이요, 사회에서는 명색이 문학평론가에다 시인이요, 가정에서는 이미 여러 식구의 가장인 내가 학교로 간들, 아니간들 무슨 의미의 차이가 있을손가. 다만 해와 달아래 억압 없고 찢김 없는 것, 그것만이 진정 기다려질 뿐이다.
80년5월 계엄포고령위반으로 구속돼 서울대로부터 제적당한 후 83년 학원자율화조치에 의해 복학을 허용 받고 본지 83년 12월22일자에 기고한 채씨의 「복, 복, 복, 복학이라니」일부다. 억압 없고 찢김 없는 사회를 위해 채씨는 복학을 포기함은 물론 「과장님」으로 재직하던 중앙신용협동조합에도 사표를 내고 문화운동권으로 뛰어들어 80년대 중반 가장 암울했던 시대의 문학운동을 주도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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