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도피냐 양심가책이냐/7명 집단자수 의문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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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수사대상 아닌데 나타나/입맞춘 배후 은폐일수도
숱한 의혹을 남긴채 「사교집단의 집단자살극」으로 서둘러 수사가 종결됐던 오대양 사건이 당시 직원 7명의 자수로 4년만에 전면 재수사를 받게됐다.
이들은 집단 변사사건 당시에는 수사기관에 이미 구속된 상태여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캐낼 수는 없지만 전후정황을 잘알고 있는 증인들이란 점에서 추가 자수가 예상되는 3∼4명과 함께 베일에 가려있던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시 의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사건의 발생에서 이들의 자수에 이르기까지의 의문점들을 모아본다.
◇석연찮은 자수=이들은 자수동기를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자수자들이 공소시효(이들의 경우 87년부터 7년)가 끝난뒤 나타나는게 상식으로 돼있어 공소시효 3년을 남기고 「자발적 자수」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제껏 수사기관의 추적을 전혀 받지않는 「안전한」 상태에서 침묵을 지키며 살아오다 돌연 7명이 함께 자수를 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따라서 전후 비밀을 잘알고 있는 이들이 사건에 직접 개입한 주도세력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아 도피수단으로 「자수­구속수감」을 택했거나,사건의 「영원한 은폐」를 노린 이들 배후의 사주로 거짓진술을 위해 사전에 입을 맞춘뒤 일제히 출두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자수후 이제껏 「사건의 열쇠」로 지목돼 추적을 받아온 당시 (주)오대양 총무과장 노순호씨(당시 32세)를 살해후 암매장 했다고 밝혀 시체발굴에 따른 신원확인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노씨에 대한 추적이 종결된다는 점을 노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체 확인등 수사과정에서 밝혀질 일이지만 노씨에 대해선 지난해까지 『관광 회사인 S사의 간부로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성급한 수사종결=경찰은 사건발생 1주일만인 87년 9월 오대양 여사장 박순자씨의 두아들(24·22세)과 공장장 이강수씨(당시 45세)가 4일동안의 천장 생활에서 탈진해 가사상태에 있는 박여인과 종업원 28명의 목을 졸라 모두 살해하고 뒤따라 함께 목매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당시 천장이 조금만 밟아도 꺼져내리는 석고보드로 돼있었고 시체가 2∼3겹으로 포개져 쌓여있던 베니어 부분 두곳의 면적은 불과 4평남짓해 32명의 남녀가 4일동안 4평의 공간에서 숨막히는 더위를 참아가며 지냈다는 경찰 발표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잠을 자려먼 2∼3겹으로 포개져 잘 수밖에 없는 현장상황이어서 이들이 이곳에 며칠동안 머물렀다는 가정도 설득력이 없었다.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이들의 몸속에서 일체의 독극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체발견 당시 시체주변에 수면제약병 10여개가 놓여있었던 점은 이들의 자살을 가장하기 위해 제3자가 가져다 놓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배후세력등=이밖에 5공비리 관련설에 대해 일체의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채권자 3백45명이 주장한 1백70억 가까운 사채의 행방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던 것도 의문점.
전경환씨가 86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전의 오대양 본사를 4차례 방문했으며 이 기간중 우수 새마을공장으로 지정된 점,회사가 2∼3년새 급속 성장한 점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권력유착에 따른 의혹이 제기돼 88년말 국회 5공비리 특위까지 열렸으나 지금껏 명쾌한 해명이 없는 것.
이와 함께 숨진 박사장의 남편 이기정씨(당시 충남도 건설국장)에 대한 조사가 이씨의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진술에 따라 서둘러 마무리된 점도 의문으로 남고있다.<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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