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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9)제86화 경성야화(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중립화 운동>
현상건과 이학균등은 시종벼슬을 지내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불어·러시아어·영어 등을 잘해서 자주 고종의 심부름으로 러시아·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왕래했다.
거기서 이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탐내 한국땅을 절반씩 나눠 먹자는 의논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한국문제로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유럽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것도 알았다.
그럴 경우 유럽에서는 강대국인 러시아가 승리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현상건·이학균 등은 노일전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우리 나라가 청일전쟁 때와 같이 전쟁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각 방면으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각국 학자와 정치가들은 한국이 국외중립을 각국에 선언, 통고하고 각국이 이를 승인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이학균과 현상건은 귀국하는 그 길로 이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한 다음 마텔·델레비구 고문 등과 상의하기도 했다.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의 중립운동에 가장 동정적인 나라가 프랑스였다.
러시아는 속으로 한국을 먹어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으므로 중립운동에 반대했고 영국도 영일 동맹을 맺어 일본이 반대하는 중립운동에 냉담했으며 독일은 러시아와 가까웠으므로 이 일에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편에서도 역시 독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알선을 교섭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우리 나라와 가장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 두 나라의 도움을 받는것이 제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상건과 이학균은 마텔과 델레비구를 통해서 이두나라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고종의 내락을 받기 위해 고종의 신임이 두터운 내장원경 이용익이 이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맹렬한 포섭활동을 벌였다.
내장원이란 왕실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나 장원 등의 재산을 관리하던 기관이고, 경이란 그 장을 말한다.
이용익은 친로파로 일본을 제일 싫어했다. 실제로 우리 나라를 제 손아귀에 넣으려고 제일 암약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궁중을 비롯, 도처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우리 나라의 움직임을 빈틈없이 탕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상건 등의 중립화운동은 일본의 스파이 작전을 피해야 하므로 여간 어렵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 우리 나라는 관리들이 부패해 있어서 돈만 주면 무슨 짓이고 다 했다.
궁중의 시종들은 물론 내시·내인들까지도 돈만 주면 무슨 일이고 다 일본쪽에 고해바쳤다.
고종이 비밀리에 결정한 일이 한 두 시간 뒤면 일본쪽에 내통돼 고종이 펄펄 뛰고 화를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므로 현상건이 동지들과 이일을 모의하기 위해 아지트로 은밀하게 이용한 곳이 다름 아닌 자신의 장인이 거처하는 「판교초당」 이었다.
우리 어머님의 증언에 의하면 1903년 (계묘년) 가을부터 사랑인 판교초당에서 밤에 자주 술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큰사위 현상건이 주인이 돼 손님으로 이학균과 그밖에 여러 사람이 온다는데 집안에서 모두 쉬쉬해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며느리들이 술상을 차리느라 바빴다고 한다.
어찌된 까닭인지 손님들은 밤늦게 아홉시쯤 하나둘씩 몰래 나타나 술을 드시고 열두시가 넘어서야 파해서 간다는데 그 손님 중에 이학균은 어머님의 일가 오라버니뻘이라서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낮에 큰 고모집에서 하인이 와서 『오늘 저녁에 큰사위 현상건이 온다』 고 전하면 할아버지는 저녁 일찍 안으로 들어오시고 며느리들은 술상준비를, 둘째 숙부는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고하는 한국스파이들의 눈을 피해 그들이 잘 모르는 널다릿골 판교초당을 아지트로 정하고 초저녁에 모이면 탄로날지 모르므로 모두들 일단 귀가해 저녁을 먹은뒤 아홉시쯤 미복차림으로 집을 나서서 판교초당에 모이는 것이었다.
미복이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입는 남루한 옷을 말한다.
따라서 어두운 밤에는 사람을 확인하기가 어려우므로 둘째 숙부가 총지휘관이 돼서 부하들을 골목 요소에 배치해 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판교초당으로 들어가는 맨 마지막 대문 앞에는 둘째 숙부가 지키고 서 있다가 손님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안으로 들여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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