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긴급조치 사건 판결한 판사 수백 명 실명공개 추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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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위원장 송기인)가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판결에 관여한 판사들의 실명을 공개할 방침이다.

그러나 당시의 실정법에 따른 판결을 두고 지금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사위는 긴급조치(74년 1월~79년 12월)를 위반한 혐의로 열린 589개 사건의 1412건 재판 결과(1.2.3심)와 관련해 판결 내용과 판사 명단을 담은 보고서를 이번 주 중 발표하겠다고 28일 밝혔다.

박영일 과거사위 홍보협력팀장은 "사건 관련자들의 이름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가명으로 처리하기로 했으나 법관의 경우 공인이라고 판단해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판결 규모로 볼 때 공개될 명단은 수백 명에 달할 것이며, 현직 사법부 고위 인사들도 일부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589건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가운데 일반 시민이나 교사.학생 등이 일상적인 대화.수업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유신체제를 비판한 발언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48%(282건)에 달한다. 보고서엔 일용직 노동자가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종신 대통령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 농민 박모씨가 "박 대통령이 여순반란에 가담했는데도 운이 좋아 대통령이 됐다"는 말을 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사례 등이 포함된다.

◆"법치주의 훼손 우려"=긴급조치가 해제된 79년 이전에 임용된 현직 법관은 대법관.헌재재판관.지방법원장 등 40여 명 선에 달한다. 이들 중 누가 긴급조치 재판에 관련됐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과거사위의 의도는 당시의 판결이 부당했고 판사가 비양심적이었다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하려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그는 "당시로선 실정법에 따른 판결이었다"며 "판사의 실명 공개는 법치주의와 판사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의 견해도 비판적 시각이 우세했다. 김종철 연세대 법대 교수는 "명단 공개가 바람직한 과거사 청산 방법인지 의문"이라며 "획일적인 잣대로 판결을 유형화하고 명단을 공개하는 방식은 당사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대 교수도 "긴급조치가 대표적인 반민주.인권침해 제도라는 부분은 되짚어 봐야지만 사법부의 과거 정리는 자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임지봉 서강대 법대 교수는 "과거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던 사법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정치적 논란 불가피할 듯"=법관들의 실명이 공개될 경우 당사자들의 도덕성은 물론 명예도 크게 훼손될 우려가 커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석연 변호사는 "과거사위가 당시 판결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할 권한을 가진 기관이 아니다"며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으로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또 다른 인격권의 침해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의해 과거사위가 판사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지난해 법원은 70년대 긴급조치 상황 등에서 내려진 일부 판결을 무효화하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다.

◆긴급조치란=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에 규정돼 있던 대통령의 특별권한으로 헌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회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등의 내용으로 유신정권이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대표적 수단이었다. 74년 1월 유신헌법에 대한 발언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1호가 선포된 것을 시작으로 75년 5월 마지막 9호가 발령돼 79년 박 대통령이 숨질 때까지 유지됐다.

백일현.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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