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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1. 서쪽에서 부는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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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평생에 두번 큰 고집을 부렸다. 하나는 국내 최초의 저온살균 우유인 파스퇴르우유를 만들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국내 처음으로 본격 영재교육기관인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설립했을 때의 일이다. 두번 모두 나 혼자만의 힘으로 기존의 체제와 질서, 그리고 문화의 두터운 벽에 도전하느라 '전쟁'을 하다시피 살아왔다. 이 글의 제목을 '나의 우유 전쟁'이라 붙였는데, 그 발단은 1970년대 이란 진출부터였다.

나는 항상 귀와 눈을 해외로 향해 열어놓고 있었다. 자주 나라 밖으로 나가 견문을 넓히고 사업 대상을 탐색했다.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다. 달러의 소지는 엄격하게 제한돼 있었고, 부부 중 한 사람이 해외로 나가면 다른 한 사람은 볼모로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74년 오키나와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리자 나는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달러를 갖고 나가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돼 있었으므로 칫솔 꽁무니에 1백달러짜리 지폐 몇 장을 꼬깃꼬깃 숨겨 나갔으나 그것 가지고는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턱없이 모자랐다.

박람회에는 볼 것이 많았으나 여비가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오는 길에 오사카에 들렀다. 오사카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때 문득 대학 친구 C가 오사카 영사관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호텔에서 전화를 걸었다.

"C군인가? 나야, 최명재. 오키나와 박람회 구경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여길 들렀어. 네 목소리나 들으려고 전화했어."

"어, 이게 누구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네 생각을 많이 하고 있던 중이었어. 당장 호텔 체크 아웃하고 짐보따리 싸놓고 기다려."

얼마 기다리지 않아 C가 호텔에 들이닥쳤다.

"여기까지 와서 호텔이 다 뭐냐. 달러를 많이 숨겨 갖고 온 모양이지."

"몇 푼 갖고 온 것 벌써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야."

"알아. 그러니 내가 달려 왔지."

C는 나를 자기 집에 묵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오사카 시내를 함께 돌아다니며 산업시설을 두루 안내했다.

"듣자니 자넨 운수업을 한다면서."

"운수업이랄 것까지는 없고, 택시 몇 대 굴리고 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지 뭐."

"그게 바로 운수업 아닌가. 해외로 나갈 생각 없나."

"생각이 있으니까 박람회에 와 본 것 아닌가."

"사람 나르는 거나 짐 나르는 거나 운수업은 다 같을 테니까. 이란에 가서 화물수송업을 해 볼 생각은 없나."

"그걸 말이라고 해. 기회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나가야지."

"내 그럴 줄 알았지. 자네라면 나가고 싶어할 줄 알았어. 자네에게 연락할 참이었는데 제발로 일본에 나타나 주었으니 이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뭐야. 무슨 길이 있는지 뜸들이지 말고 어서 얘기나 하라고."

"이 친구, 성질은 여전히 급하네.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지배하고 있는 걸프사가 유럽으로부터 이란으로 실어 나르는 유전용 자재 수송업자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야. 한번 도전해 보지 않겠나."

"않겠나가 다 뭐야. 당장 갈 테니 소개나 잘 해 줘. 일단 한국에 들렀다가 곧장 가 보겠어."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한국에 들를 것 없이 여기서 바로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여비 말인가. 내가 돌려주지. 시간이 없어. 이 사람아."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 필자 프로필

▶1927년 김제 출생▶1951년 서울대 상대 4년 중퇴▶51~66년 한국상업은행 근무▶69년 성진자동차공업사 설립▶73년 성진협동㈜ 설립▶74~77년 이란서 걸프사 수송용역업▶77년 성진낙농㈜ 설립▶87년 파스퇴르유업㈜ 설립▶93년 학교법인 명재학원 설립▶96년 민족사관고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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