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영권 다툼 두 주인공 한자리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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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가가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22일 양수리 정인영 한라그룹전 명예회장의 부인 김월계씨의 묘지에서 현정은(오른쪽)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정상영(왼쪽) KCC 명예회장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

고(故)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명예회장이 최근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이 불거진 이래 처음으로 21일 서울의 한 빈소에서 얼굴을 맞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눈길조차 나누지 않아 싸늘한 현재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최근의 상황과 관련, 협상 대상은 현 회장이 아닌 그의 친정 어머니 김문희씨라면서, 현 회장과는 조만간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또 정 회장은 김씨가 현재 가지고 있는 현대엘레베이터의 지분을 현 회장에게 넘기고 나면 김씨와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과 정 명예회장이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한 곳은 한라 그룹 정인영 전 명예회장 부인인 김월계 여사의 빈소. 현 회장은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서울 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의 영안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10시쯤 정 회장이 도착하자 취재진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퍼부었다.

이에 빈소 한 쪽에 이미 자리를 하고 있던 현 회장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정 회장도 "오늘 이런 자리인만큼 사진이나 잘 찍어 주시오"라고 말한 뒤 현 회장과는 아무 대화나 눈길도 나누지 않은 채 한 쪽에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정 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되자 "요즘 이런 상황에선 내가 욕 먹는 게 아니냐"며 다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정 회장은 이어 "앞으로 현정은 회장과는 만날 생각이 없다. 현 회장은 내 며느리로 감싸줘야 할 사람이다"라면서 "김문희 여사와 만나겠다. 앞으로도 현회장을 계속 돕겠다"고 말해 현대그룹 경영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현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와 해결할 생각임을 비쳤다.

이어 양평 장지에 도착한 정 회장은 "김문희 여사와는 언제 만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문희 여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당장 현정은 회장에게 넘겨야만 얘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가 지분을 현 회장에게 넘긴 후에야 김씨를 만날 용의가 있다는 뜻이다.

정 회장은 또 장지에서 내려오며 기자들에게 "현정은 회장이 자리를 잡으면 늦어도 주주총회 전까지 서로의 오해를 풀고 싶다”며 "현 회장과 공동기자회견도 고려해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정 회장과 현 회장은 장지에서도 서로 5m가량 떨어진 채 나란히 걸으면서 서로 눈길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내려왔다. 이들은 오후 1시 40분쯤 각각 차에 올라타고 장지를 떠났다.

한편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은 현 회장의 시숙부인 정 명예회장의 KCC 측이 지주회사 격인 현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50% 이상을 확보하고 실질적인 경영권을 인수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촉발됐다.

정 명예회장 측은 그동안 현대그룹의 실질 지배권이 사돈 관계인 김문희씨에게 있는 점과 관련, "현대그룹은 정씨 일가가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고 정몽헌 회장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받았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12.87%)의 의결권을 넘겨받아 그룹을 섭정할 생각이었으나, 현 회장 측이 이를 거부하자 지분 매집에 돌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 회장은 이사회를 열어 1천만주(1백78%)를 유상증자키로 결의하고,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국민주로 공모하겠다면서 KCC측에 대반격을 선언했다.

이에 당황한 KCC측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추진 중인 1천만주 유상증자를 막기 위해 관할법원인 여주지원에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소송'을 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21일 금융감독원이 KCC가 뮤추얼펀드를 통해 확보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7.81%에 대해 '의결권 제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양측의 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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