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치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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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영옥(1951~) '치명적' 부분

임자 없는 옷 한 벌 짓느라
오래도록 정신 팔고 품팔았다
고단하여 잠시 누웠던 꽃나무 밑 잠
꽃봉오리가 터지며 나도 터졌다
치명적 도약이었다. 규정이 확 터졌다
풀어진 이마에서 쏟아지는 푸른 기억의
송곳에 한번 더 깊숙이 찔린다.



태풍이 휩쓸고간 다음의 고요가 아닌가. 갈망의 처음에서 마지막 끝까지의 도약과정에서, 그 뜨거운 갈망이 자신의 내부를 돌고 도는, 반복적인 것인 줄을 알아버린 뒤의 적막함에서 깨닫는 허탈, 허망, 붙잡고 안달하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순간에는 스스로 다그치던 규정도 한순간에 문진다. 한꺼번에 터진다. 시는 어느 순간 이런 깨달음이고 도약이 아니던가. 안간힘 써온, 견디어온 의지와 열망 사이의 갈등은 드디어 곪아 터져, 더 이상은 도리없게 되고 마는 바로 그 폭발하는 순간에 이 시가 탄생되었구나.

유안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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